변광식(邊光軾, 1648~1679)은 전라도 장성 출신으로 자는 여첨(汝瞻), 호(號)는 범호정(泛湖亭), 본관은 황주(黃州)이다.
증조 변이중(邊以中, 15461611)은 문신이자 학자로서 군사 전략에도 뛰어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큰 공을 세웠다. 할아버지 변경윤(邊慶胤, 15741623)은 율곡 · 우계의 학문을 계승하였고, 아버지 변명익(邊命益, 1610~1660)은 석주(石洲) 권필(權韠)에게서 수학하였으며, 문예(文藝)가 매우 뛰어났다. 그 후 다시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에게 사사(師事) 받고 뛰어난 유학자가 되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는 임금의 수레를 호종(扈從)하였으며, 평창(平昌)과 가흥(嘉興) 그리고 금산(錦山) 등에서 관직을 수행할 때 청선정비(淸善政碑)가 세워지는 등, 청렴결백하게 살았다. 또 은산(恩山)에서 도적들을 토벌하였을 때는, 그 공을 모두 부하에게 돌리는 등 여러 면에서 미덕을 보이자,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이 그를 매우 칭찬하였다. 형은 변광재(邊光載),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제3녀인 경순군주(慶順郡主)와 혼인한 황창부위(黃昌副尉) 변광보(邊光輔)가 있고, 누이는 홍수기(洪受箕), 임방(任埅)과 혼인하였다.
그는 1675년(숙종 1) 진사 증광시에 입격하였다. 부친의 학문을 이어받아 일찍이 시(詩)와 서(書)와 화(畵) 삼절로 이여(李畬), 최석정(崔錫鼎), 임영(林泳), 김창협(金昌協), 오도일(吳道一), 임방(任埅), 홍수주(洪受疇)와 함께 ‘장안 팔재자(長安八才子)’로 칭송받았다. 여주 여강에 범호정을 지어 서문중(徐文重), 이사명(李師命) 등 32인과 함께 난정계를 설립한 바 있다.
2권 1책의 필사본이다.
서문과 발문이 없어 편찬 경위를 알 수 없다.
2권 1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앞에 목록이 있다.
권 1 목록에는 시 258수, 상량문(上樑文) · 잡저(雜著)(E0048216) · [서(書) 각 1편, 권2 목록에는 부록으로 제문(祭文) · 유사 · 묘갈명을 비롯하여 저자가 지은 잡저 등이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본문은 권별 구분 없이 시가 수록되어 있다.
시에는 비유적 묘사가 훌륭한 「추규원(秋閨怨)」 · 「정부원(征婦怨)」 등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소상팔경(瀟湘八景)」을 비롯하여 다수의 유람 · 차운의 의도로 지은 시가 있다. 「억진아(憶秦娥)」 · 「부불취(富不取)」 · 「설매(雪梅)」 · 「원장도가측(願葬陶家側)」 · 「절부구조(竊符救趙)」 등은 제재가 다양하며, 그밖에 「궁사(宮詞)」 · 「춘성사(春城詞)」 · 「양류사(楊柳詞)」 · 「패강사(浿江詞)」 · 「소년행(少年行)」 · 「임종사(臨終詞)」 · 「우림영곡(雨霖鈴曲)」 등도 실려 있다.
「범호정상량문(泛湖亭上樑文)」과 잡저의 「범호정서목(泛湖亭序目)」은 저자가 여주 여강에 지은 범호정에 대한 것으로 교우들과 더불어 조직한 난정계(蘭亭契) 등의 배경 및 설립 취지 등을 서술한 것이다.
부록에는 난정계의 임원인 김익렴(金益廉) · 조종저(趙宗著) · 이정명(李鼎命) 등을 포함한 33인의 인명부를 기재한 「종남속난정회(終南續蘭亭會)」와 저자의 부모의 계보를 도식으로 설명한 「십육현조도(十六玄祖圖)」를 비롯하여 교우 임방(任埅)이 저자의 시를 차운하여 지은 10여 수의 차운시와 형 변광재(邊光載)가 보낸 편지 및 친구인 홍수주(洪受疇) · 조구상(趙龜祥)이 지은 「제문(祭文)」과 손자 변치도(邊致道)가 지은 「서묵첩후(書墨帖後)」, 족후손(族後孫) 변시연(邊時淵)이 지은 「유사(遺事)」, 이규헌(李圭憲)이 지은 「묘갈명」 등이 수록되어 있다
『범호정유고』는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전라남도에서 발행한 『향토문화연구자료(鄕土文化硏究資料)』 제2집에 변광식의 손자 변치도의 문집인 『죽천재유고(竹泉齋遺稿)』와 함께 영인 · 수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