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정동리 고분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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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정동리 고분군 출토 전
부여 정동리 고분군 출토 전
고대사
유적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돌방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이칭
이칭
정동리고분군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돌방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개설

고분은 정동리 와요지(瓦窯址) 뒷산인 높이 120m의 주장산(主葬山) 남쪽 사면에 집중 분포한다. 이곳에는 주장산성 혹은 건물지, 와요지 등 많은 유적이 주변에 분포하고 있어 다량의 고분이 분포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현재 지표면에서 확인할 수 있는 고분 가운데 내부구조와 드러난 채로 방치된 고분은 2기이며 대부분이 파괴되어 함몰된 상태여서 고분 유구의 성격은 알 수 없다.

1971년 5월 밭갈이하던 중 지표 아래 30㎝에서 문양전(文樣塼) 조각 18개가 발견되었고 이곳에서 서쪽으로 50∼70㎝ 떨어진 곳에서 괴석(塊石) 4개가 1.7m의 길이로 열을 이루고 있는 것도 발견되었다.

내용

벽돌〔塼〕은 완전한 것은 없었으나 무늬가 있는 면만은 파손되지 않아 형상은 알아볼 수 있다. 무늬별로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① 무문전(無文塼):3개가 출토되었으며, 장방형의 회색으로 반듯하게 만들어졌다. 현재 너비 17㎝, 두께 4.6㎝만이 남아 있다. 태토는 모래가 약간 섞여 있으나 아주 고운 편이다.

② 연화문전(蓮花文塼)A: 1개가 출토되었으며, 단측면(短側面)에 연화문이 한 쌍 들어 있다. 두께 4.2㎝∼4.4㎝, 너비 13㎝, 길이로는 반조각만이 남았다. 흑청색으로 단단하고 치밀하며 태토에는 숯이 약간 섞여 있고 앞면에 자연유(自然釉)가 덮여 있다.

③ 연화문전B: 2개가 출토되었으며, 사다리꼴의 단측면에 연화문 반쪽이 두툼하게 표출되어 있는데 양쪽이 합해 하나의 완전한 연화문을 이룬다. 두께 3.8∼4.3㎝, 너비는 바깥쪽이 10.7㎝, 안쪽이 13㎝, 길이는 절단되었다. 태토는 흑회색으로 견치하고 고운 모래알이 섞여 있다.

④ 연화사격문전(蓮花斜格文塼):4개가 출토되었으며, 장측면 양단에 연화문이 각각 1개씩 있는 장방형으로 중심에 사격문이 있다. 두께 3.4∼3.8㎝, 너비 15.5∼16㎝, 길이 32㎝의 흑회색 벽돌이다.

⑤ 대방명문전(大方銘文塼):3개가 출토되었으며, 장방형이다. 장측면에 ‘대방(大方)’이라는 두 글자가 길이로 양출(陽出)되었는데, 글자의 지름은 2.4㎝이다. 두께 4.5㎝, 너비 15.8㎝, 길이는 절단되고 표면에 자리무늬가 있다. 태토는 흑회색이다.

⑥ 중방명문전(中方銘文塼):2개가 출토되었으며, 장방형이다. 장측면에 ‘중방(中方)’ 두 자를 길이로 새겼는데 글자의 지름은 2.2㎝이다. 두께 3.9∼4.5㎝, 너비와 길이는 완전하지 못하다. 태토는 흑갈색이고 표면에 자연유가 덮여 있다.

그밖에 3개의 문양전 조각이 발견되어 모두 18개가 출토되었다. 출토된 문양전 조각들은 공주 송산리 제6호분이나 박씨산소(朴氏山所) 출토품과 비교해볼 때 질과 형태가 대동소이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차이점도 간과할 수만은 없다.

① 송산리전은 유약이 없으나, 정동리의 것은 유약이 덮여 있는 것이 많다.

② 소성도(燒成度)는 송산리의 것은 대체로 낮고 보다 연질이고 색조도 붉은색계통이 많은데 비해, 정동리의 것은 강도가 높아 갈라진 것이 많고 색조도 흑회색계통이다.

③ 명문의 글자 지름도 송산리 것이 3,4㎝인데 비해, 2㎝ 내외로 보다 작다.

④ 태토는 무공(無孔)·무탄(無炭)·무사(無砂)의 정선된 송산리 것에 비해, 기공(氣孔)이 많고 숯과 모래가 섞여 있다.

⑤ 문양은 송산리의 것은 연화문이 크고 꽃잎이 크게 길고 또 그 끝을 반전시키고 있는데 비해, 정동리의 것은 꽃잎이 짧고 반원형으로 두껍게 되어 있다. 그리고 무늬를 새긴 면이 송산리의 것은 오히려 좁고 무늬는 큰데, 정동리의 것은 반대로 되어 있다.

이러한 차이점들은 제작된 시기, 공장(工匠)·공인(工人) 등이 모두 달랐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또한 벽돌의 용도에 관한 차이도 무시할 수 없다. 송산리에서는 무문전을 바닥에 사용하고 문양전을 벽의 축조에 사용하였다.

그런데 정동리는 수량이 적기 때문에 송산리와 같은 벽돌무덤〔塼築墳〕을 축조한 부분품으로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50∼70㎝ 거리에 있는 1.7m의 석렬과 관련시켜볼 수밖에 없다. 석렬이 돌덧널이나 돌방의 남은 부분이라면 벽돌 조각들은 무덤 내부 바닥에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현재 내부구조가 확인된 고분의 구조는 작은 판석을 재료로 하여 벽석을 꾸민 후 장방형 괴임석을 놓고 천정부에 판석을 올려 놓은 평사천정의 소형 괴임식 돌방무덤이 주를 이루고 있다.

백제지역에서는 대방이라든가 중방과 같은 명문이 출토된 예가 그다지 많지 않으므로 정동리고분군에서 명문전이 발견된 것은 백제사 연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이 고분군의 축조시기는 대략 웅진시대보다 늦은 사비천도(泗沘遷都) 이후인 6세기 후반 정도로 보인다.

참고문헌

『부여백제고분지표조사』Ⅰ(부여문화재연구소, 1994)
「부여정동리출토묘용전」(강인구,『고고미술』110,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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