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척사론 ()

근대사
개념
1881년 척사상소를 중심으로 전개된 위정척사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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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신사척사론은 1881년 척사상소를 중심으로 전개된 위정척사운동이다.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에 신사년(1881)에 개화파에 대항하기 위하여 제시된 사상이다. 일본과의 접촉으로 정부 내부에 개화사상이 침투하여 친일적인 개화파가 형성되었다. 정부에서는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복사하여 배포하자, 이를 계기로 위정척사론자의 척사 상소가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척사상소는 경상도 이만손 등이 올린 영남만인소이다.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고 있던 민족적 위기상황 속에서 민족자존을 위한 주체적인 민족의식과 애국우국정신의 발로라고 평가할 수 있다.

정의
1881년 척사상소를 중심으로 전개된 위정척사운동.
개설

신사척사론은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노골적인 개화 움직임을 화이의식적(華夷意識的)인 위정척사사상의 입장에서 반대하고, 개화파에 대항하기 위하여 제시된 사상이다.

역사적 배경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조선은 타의반 자의반으로 일본과의 공식적 또는 비공식적인 접촉이 빈번해졌다. 공식적으로는 1876년 일본대리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의 내조(來朝), 1876년 수신사 김기수(金綺秀)와 1880년 수신사 김홍집(金弘集) 일행의 방일이 있었다. 비공식적으로는 1879년 이동인(李東仁)의 도일(渡日), 1881년 박정양(朴定陽) 등 62명으로 구성된 신사유람단의 일본시찰, 김옥균(金玉均)의 도일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일본과의 접촉으로 정부 내부에는 점차 개화사상이 침투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박정양 · 김옥균 등의 일본시찰 결과 개화의식은 더욱 높아져서 친일적인 개화파라는 정치집단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추세에 대항해 형성된 세력이 유림 중심의 위정척사론적 정치집단인 수구파였다.

이 양대 정치세력의 직접적인 격돌은 김홍집이 일본에서 들여온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朝鮮策略)』에서 비롯되었다. 『조선책략』에서는 조선의 대외적인 위험성은 제정러시아의 침략가능성에 있기 때문에 친중국(親中國) · 결일본(結日本) · 연미국(聯美國)하는 ‘균세’의 방법으로 방지할 것, 천주교는 주자학(朱子學)이나 양명학(陽明學)과 같은 것이므로 배척해야 한다는 것 등이 강조되어 있었다.

김홍집 귀국 후 원임대신(原任大臣) 회의에서도 구미열강과의 외교관계 수립은 불가피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정도로 정부의 정책은 개화 쪽으로 기울어져갔다. 뿐만 아니라 정부는 『조선책략』을 복사해 전국 유생에게 배포하여 정부의 개화의사를 표명하였다. 그러나 유림의 입장에서 볼 때, 개화사상은 오랑캐인 구미열강과의 외교관계 수립을 종용하고, 천주교 · 서양학 등 사학(邪學)을 주자나 왕양명(王陽明)과 같은 성현의 학과 동일시하는 매우 위험한 사상이므로 마땅히 배격되어야 했다. 개화를 몰고 온 『조선책략』을 매개로 하여 개화파에 대한 유림의 반박이 개시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신사척사상소의 파동이다.

경과

신사척사상소에 앞서 1875년 청국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이 조선의 영중추부사 이유원(李裕元)에게 보낸 밀함(密函)의 내용도 『조선책략』과 거의 같은 논지였다. 이 밀함은 일본의 독점적 조선진출을 막기 위해서는 독으로써 독을 제지하는(以毒制毒) 방책, 즉 영국 · 미국 · 독일 · 프랑스 등 구미제국과 조약을 맺어 러시아와 일본을 견제함과 동시에 강병책을 쓸 것을 권고하고 있었다. 다만 견제의 대상으로 제정러시아뿐만 아니라 일본이 포함되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유원은 위정척사론자의 반격을 두려워해서인지 또는 자신의 유림적 성격에서인지, 구미열강과의 조약은 시기상조라는 이유를 내세워 반대하였다.

그러나 강병책의 일환인 유학생의 파견문제는 추진되었다. 1880년 조선으로부터 파견된 변원규(卞元圭)와 청국 이홍장측의 정조여(鄭藻如) · 유지개(游智開) · 허기광(許其光) · 유함방(劉含芳) 등과의 사이에 「조선국원변래학제조조련장정(朝鮮國員弁來學製造操練章程)」이 성립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추이 속에서 국왕을 비롯한 정부수뇌부의 개화책에 대한 인식은 더욱 높아져갔다. 정부는 새 시대에 적응할 수 있는 관제로 개혁하고 청국과 일본에 유학생 및 시찰단을 파견하여 신문명을 받아들이는 등 개화책을 계속 구체화해갔다.

그러나 위정척사론자의 척사상소를 통한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척사상소는 『조선책략』의 사학성(邪學性)을 통박하고, 그것을 들여온 김홍집에 대한 규탄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나아가 이홍장과 밀함을 주고 받은 이유원을 비판하고, 국왕 친정 이래의 실정을 비판하는 정도로까지 격화되었다. 척사상소가 신사년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이때의 위정척사사상을 신사척사론이라 한다.

결과

신사척사상소 중 대표적인 것은 경상도유생 대표 이만손(李晩孫)을 소두로 하고 강진규(姜晋奎)를 작소자로 하는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이다. 이 상소는 『조선책략』의 사학성에 대한 비판과 김홍집에 대한 규탄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조선책략』이 방아책(防俄策)으로 친중국 · 결일본 · 연미국을 건의하고 있으나, 러시아는 우리 나라와 적대국이 아닌데 먼 나라에 의지해 가까운 나라를 물리치는 방책을 쓴다는 것은 오히려 그들의 침략을 유발할 위험성이 있고, 특히 러시아나 미국 · 일본은 다같은 오랑캐여서 후박의 차이를 둘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서양학을 배워 치재 · 권농 및 상공 등에 진력해야 한다고 하지만 우리에게는 선왕 이래의 좋은 법규가 있으니 그렇게 할 필요성이 없다고 하였다. 국왕은 모름지기 주공(周公) · 공자 및 정주(程朱)의 가르침을 더욱 선양하여 민심을 보루로 삼고 사악한 무리의 침투를 막아야 한다면서 위정척사의 태도를 분명히 하였다.

이 상소로 말미암아 이만손과 강진규는 유배되었으나, 척사운동은 날이 갈수록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같은 해 4월의 홍시중(洪時中) · 황재현(黃載顯)의 상소를 비롯하여, 6월에는 경상도 유생 대표 김진순(金鎭淳), 경기도유생대표 유기영(柳冀永), 충청도 유생 대표 한홍렬(韓洪烈) 등의 상소가 잇달아 있었다. 이와 같은 상소공세에 대처하여, 정부는 억압책을 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회유책으로서 전통적인 척사를 천명하는 국왕의 윤음(綸音)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척사상소에 대한 탄압이 여전한 데다가 척사윤음의 기만성에 반발한 유생들의 반발은 더욱 커졌다. 그 해 8월에 경기도 유생 신섭(申㰔), 강원도 유생 홍재학(洪在鶴), 충청도 유생 조계하(趙啓夏), 전라도 유생 고정주(高定柱) 등이 각각 4도 유생의 연서로 상소한 것이 그 예이다. 신섭은 김홍집뿐만 아니라 밀함을 주고 받은 이유원도 규탄하였다. 이홍장의 밀함과 황준헌의 『조선책략』은 서로 상통하는 것이며, 이유원과 김홍집은 표리상응하여 국왕을 현혹하고 국시를 흔들어놓은 장본인이어서 마땅히 처형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4도 유생들 중에서도 홍재학 등의 상소가 매우 흉악하고 방자하다 하여 소두 홍재학은 참형되고 제소자 김평묵은 유배되었다. 다른 상소와 달리, 이 상소는 김홍집 · 이유원의 규탄에 그치지 않고 국왕이 친정 이래 위정척사의 태도가 석연치 않았다는 것, 사학의 무리를 방치한 실정이 있었다는 것, 나아가 국왕의 척사윤음이 기만적이었다는 것까지도 폭로했던 것이다.

의의와 평가

1881년 절정에 달했던 신사척사상소에 나타난 척사론은 원천적으로는 주자학적 유교사상 특히 화이적 춘추대의와 벽이론을 사상적 지주로 하고 있었으나, 직접적으로는 위정척사론자의 정신적 스승인 이항로(李恒老)의 사상을 토대로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신사척사상소는 정책적으로는 흥선대원군의 쇄국양이정책에로의 복귀로 보이기 쉽고, 의식적으로는 고루한 유생들의 배타적이고 보수적인 고집으로 판단하기 쉽다.

그러나 당시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고 있던 민족적 위기상황을 감안하면, 신사척사론은 민족자존을 위한 주체적인 민족의식과 애국우국정신의 발로라고 높이 평가할 수 있다. 또한 신사척사론에 강하게 작용하는 배타성과 보수성이 우리나라의 근대화를 지연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참고문헌

『고종실록(高宗實錄)』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정교)
『수신사일기(修信使日記)』(김홍집)
『한국(韓國)의 민족사상(民族思想)』(홍순창, 탐구당, 1975)
「한국민족주의(韓國民族主義)의 형성과정(形成過程)」(홍순창, 『동양문화(東洋文化)』18, 1977)
「한말민족의식(韓末民族意識)의 성장과정(成長過程)」(홍순창, 『성곡논총(省谷論叢)』2,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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