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정척사사상 ()

목차
관련 정보
중암문집(권38) / 어양론
중암문집(권38) / 어양론
근대사
개념
바른 것을 지키고 옳지 못한 것을 물리친다는 벽이론에 바탕한 새로운 유교적 정치윤리사상. 유교용어.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위정척사사상은 바른 것을 지키고 옳지 못한 것을 물리친다는 벽이론에 바탕한 새로운 유교적 정치윤리사상이다. 여진족의 핍박을 받던 남송에서 주자가 민족적 화이의식을 근간으로 하여 존왕양이의 춘추대의로 이민족을 응징할 것을 역설하며 체계화한 사상이다. 중국 중심의 화이적 보수성과 배타성이 그 바탕에 깔려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서세동점의 여파로 천주교가 전래되면서 유교질서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고유의 위정척사사상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항로를 비롯한 유학자들은 보수적인 화이사상을 극복·지양하여, 민족주체성을 확립하는 민족주의사상으로 승화시켰다.

목차
정의
바른 것을 지키고 옳지 못한 것을 물리친다는 벽이론에 바탕한 새로운 유교적 정치윤리사상. 유교용어.
내용

송대 이후 여진족의 침공으로 한민족(漢民族)과 중화문화가 위기에 봉착했다. 이러한 위기상황에서 주자(朱子)는 한민족의 독립과 문화적 자존성을 확립하기 위해 유교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존왕양이의 춘추대의로 이민족을 응징할 것을 역설하여, 민족적 화이의식(華夷意識)을 근간으로 한 위정척사사상을 체계화하였다. 위정척사사상의 바탕이 된 성리학은 한대 이래의 훈고학적 유교를 이기설(理氣說), 즉 의리(義理)와 심성(心性)을 중심으로 철학화한 형이상학적인 유교이다.

원래 위정척사라는 말은 바른 것을 지키고 옳지 못한 것을 배척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정사(正邪)의 의식은 역사적 상황과 여건에 따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고, 정통문화가 이질문화의 도전을 받았을 때 발생하는 의식이다. 주자의 위정척사사상도 근저에는 성리학의 이기설이 있으나, 형이하학적으로는 여진의 무력도발로 위기에 봉착한 중화적 정통문화인 유교를 수호하기 위하여 정립된 것이다.

조선왕조는 건국과 동시에 신유교 성리학을 국가지도이념으로 받아들여 정통사상으로 정립해 갔다. 이황(李滉)이이(李珥) 등 뛰어난 주자학자가 배출되면서 성리학은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성리학은 점차 형식화, 전통화하면서 그 본질을 상실해 갔다. 이를 시정하기 위하여 실학(實學)이 대두하였는데, 실학은 기본적으로 유교의 테두리내에 있었기 때문에 크게 마찰이 일지는 않았다. 그러나 서세동점의 여파로 천주교라는 이질적인 서학(西學)이 들어오자, 유교질서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위정척사사상은 싹트기 시작하였다. 천주교가 전통사회를 위협하는 위험한 사상으로 작용하였기 때문에 정학인 유교를 강화 선양하고 사학(邪學)인 천주교를 배척할 필요성이 강조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위정척사사상이 대두한 시기는 천주교가 우리 나라에 보급되기 시작한 정조 초기로 추정된다. 위정척사사상은 주자학적 화이의식에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 보수성과 배타성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 나라 성리학자인 유림들의 존명배청의식(尊明排淸意識), 이질적 문화를 무조건 비문화(非文化)로 말살하려는 태도는 주자학적인 배타성을 반영한 것이다.

천주교는 충효를 최고의 도덕으로 평가하는 전통적인 예교질서를 부정, 파괴하는 교리이기 때문에 성리학자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이단사설로 배척되었다. 나아가 이단사설인 천주교를 신봉하는 자는 사람이 아닌 금수로 규정되어 이른바 인수대별적(人獸大別的) 화이의식이 발생하였다. 주자학적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하고 있는 조선왕조의 입장에서 볼 때도 천주교는 국가의 전통질서를 파괴하는 반국가적 · 반사회적인 위험사상이었다.

위정척사사상에는 중화적 벽이론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사대주의적 모화사상의 한계성이 내재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적 한계성은 한말의 역사적 위기상황 속에서 자각된 민족주체성의 확립에 의해 극복, 지양되어갔다. 위정척사사상은 그 바탕에는 주자학적 화이의식이 작용하고 있으나, 한말에는 보수적 화이사상을 애국우국의식으로 발현시켜 민족주의사상으로 승화되어갔던 것이다. 한말에 있어서 위정척사사상을 애국우국의식의 민족주의사상으로 발전시킨 사상가는 이항로(李恒老)기정진(奇正鎭)이다.

기정진은 병인양요 때 올린 상소에서 인수대별적 의식을 이론화하여 서양인을 금수로 규정하고 배양의식을 현실적 역사의식으로 구체화하였다. 또, 그는 천주교를 물리치기 위하여는 우선 국력을 배양해야 한다는 내수외양론(內修外壤論)을 역설하였다. 나아가 그는 양물금단론(洋物禁斷論)을 펴서 서양의 경제적 침략성을 간파하여 개국을 적극 반대하였다. 기정진의 위정척사사상은 서양의 침략성을 간파한 역사적 통찰력이 있었고 이를 통해 한말 위정척사운동의 지도이념인 위정척사사상의 원류의 하나가 되었다.

이와 같은 기정진의 민족자존적인 위정척사사상을 이어받아 실천한 사람은 기우만(奇宇萬)송병선(宋秉璿)이다. 기우만은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단발령을 계기로 일제의 만행과 위정자들의 친일개화를 응징, 배격하기 위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또, 그는 1905년 을사조약이 일제의 강압으로 체결되자 결사항쟁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송병선은 「벽사론」을 지어 양학(洋學)의 배격과 강화도조약의 체결을 반대하였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조약의 폐기와 조약체결에 참여한 역신들의 참형을 극력으로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순국하였다.

한말 위정척사사상의 양대 지주의 한 사람은 이항로이다. 그는 성리학을 주리철학으로 대성시킨 한말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이다. 그의 심전주리설적 주리철학(心專主理說的主理哲學)은 형이상학적 관념론이기는 하나, 근저에는 존왕양이의 춘추대의를 민족적으로 승화시킨 애군여부 우국여가(愛君如父 憂國如家)하는 애국우국정신이 있었다. 그는 병인양요 때 올린 상소에서 주전척화론(主戰斥和論)을 전개하고 천주교를 이단사설로 규정하였다. 또, 그는 서양의 경제적 침략성을 간파하여 서양제품의 사용금지론과 불매불용론(不買不用論)을 제시하기도하였다. 그의 애국우국정신, 위민정치관, 문화적 자존의식, 경제적 배타성은 한말의 역사적 위기상황에서 위정척사사상의 전개방향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이항로의 사상은 제자들에 의해 실천화, 행동화하여 한말 위정척사사상의 주류가 되었는데, 김평묵(金平默) · 유중교(柳重敎) · 최익현(崔益鉉) 등이 대표적이다. 1880년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이 일본에서 가지고 온 청국인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으로 말미암아 신사척사론(辛巳斥邪論)이 발생하였다. 이 책자는 러시아의 남하정책의 대비책으로 조선국은 친청(親淸) · 결일(結日) · 연미(聯美)의 외교정책을 수립할 것과 서양의 제도 기술을 배워 부국강병책을 쓸 것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유림들은 이 책을 개국과 양화를 종용한 사설로 규정하고, 책을 국내에 반입, 보급한 김홍집을 처형하기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영남유생 이만손(李晩孫)을 소두로 하는 만인소(萬人疏)가 그것이다.

이 상소에 대해 김평묵은 성현의 가르침을 지키고 왜양(倭洋)의 금수와 같은 풍습 등을 배격한 만고에 없는 상소라고 격려, 고무하는 글을 소청에 보냈다. 또, 그는 강원도 유생 홍재학(洪在鶴) 등의 척왜소(斥倭疏)를 대필하여 일본과의 개화를 반대하면서 이에 미온적인 태도를 취한 국왕을 비난하였다. 그 결과 상소의 내용이 과격하고 방자하다 하여 홍재학은 참형되고 대필자 김평묵은 유배되었다. 그의 사상이 인수대별적 화이의식에 근거하고 있으나 단순히 배타적이고 보수적이라고만 볼 수 없는 것은, 민족자존과 민족문화의 자존을 위한 자각된 자주의식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의 어양론(禦洋論)은 한말 위정척사운동의 실천이념의 중요한 갈래를 형성하였다. 유중교도 신사척사론이 비등했을 때 이에 동조하여 정통사상과 예교질서를 수호할 것과 화이적 춘추대의로 척양척왜할 것을 역설하여, 스승 이항로의 애국우국적인 위정척사사상을 실천하였다. 열렬한 항일의병장이었던 유인석(柳麟錫)이 그의 제자였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김평묵과 더불어 한말 위정척사사상의 2대 실천자의 한 사람인 최익현은 스승 이항로의 사상을 이어받아 그것을 위국여가적(爲國如家的)인 충의사상과 존왕양이의 춘추대의론으로 승화, 발전시켜 자주적 민족사상으로 체계화하였다. 전자는 주로 국내정치적 차원에서 관인지배체제에 나타난 정치적 · 경제적 부정부패를 바로잡기 위한 왕도정치의 이론으로 작용하였다. 후자는 주로 대외적 위기상황에서 외침을 물리치기 위한 왜양배척의 실천 명분론으로 전개되었다. 즉, 전자의 경우는 흥선대원군 집정에 대한 왕도정치의 구현을 위한 상소로 표현되었고, 후자의 경우는 1876년 강화도조약을 계기로 밀어닥친 왜세에 대한 척왜척화의 방향을 제시하기 위한 상소들로 표현되었다. 그의 위정척사사상은 바로 후자인 척왜척화적인 상소들에 의하여 구현되었다. 그의 사상은 이미 강화도조약 때 올린 지부복궐척화의소(持斧伏闕斥和議疏)에 나타나 있으나, 단발령을 계기로 정통문화를 스스로 지키겠다는 자수사상(自守思想)과 민족주체의식이 더욱 강해졌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그의 사상은 항일의병 무력투쟁으로 행동화되었다. 이 조약을 민족의 자존권을 박탈하는 일제의 침략으로 규정하고, 조약의 무효를 만천하에 공포할 것을 강력히 주창한 것은 그의 위정척사사상이 구국제민의 실천철학으로 발전된 결과였다. 이러한 사상적 심화는 급변하는 역사적 위기상황 속에서 관념적인 상소운동이 아니라, 민중 속에서 위정척사를 행동화하면서 실천화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즉, 역사적 상황변동에 따라 위정의 가치내용과 척사의 배척대상의 새로운 수정이 불가피하였던 것이다. 70세의 고령으로도 항일의병운동의 선두에 섰던 그는, 포고팔도사민(布告八道士民) · 기일본정부(寄日本政府) ·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 및 유소(遺疏) 등의 글을 통하며 애국충정을 피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한말 위정척사사상은 주자학적 유교사상, 즉 성리학의 화이적 춘추대의와 존왕양이의 명분론을 사상적 근간으로 하고, 이항로의 애국우국정신과 기정진의 내수외양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사상은 그들의 제자 김평묵의 척화적 어양론과 최익현의 실천적 척화론에 의하여 항일민족운동의 지도이념으로 정착함으로써 민족주의사상으로 발전하였다. 여기에 한국적 위정척사사상의 특질이 있다. 위정척사사상을 한말에 있어서의 배타적 · 보수적인 사상, 근대화를 저해한 사상으로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 견해에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나, 한말의 위정척사사상은 단순히 배타사상 · 보수사상으로만 볼 수 없으며 보다 긍정적으로 재평가되어야 할 사상이다.

참고문헌

『주자대전(朱子大全)』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이황)
『로사집(蘆沙集)』
『화서집(華西集)』
『중봉집(重峰集)』
『면암집(勉菴集)』
『매천야록(梅泉野錄)』
『한국의 사상』(최창규, 서문당, 1973)
『의병운동사』(김의환, 박영사, 1974)
『한말의 민족사상』(홍순창, 탐구당, 1975)
「한말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에 관한 연구」(홍순창, 『동양문화』 11, 1970)
「위정척사(衛正斥邪)사상과 민족의식」(홍순창, 『영남사학』 1, 1971)
「한말민족의식의 형성과정」(홍순창, 『동양문화』 18, 1977)
관련 미디어 (3)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