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소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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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문신인 박문호(朴文鎬, 1846∼1918)가 1882년 부녀자들에게 필요한 글을 모아 한글로 풀이한 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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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후기 문신인 박문호(朴文鎬, 1846∼1918)가 1882년 부녀자들에게 필요한 글을 모아 한글로 풀이한 교재.
내용

6권 6책. 필사본. 그의 문집인 『호산집(壺山集)』의 부록 권1에 나오는 연보의 임오년(호산의 나이 37세 때) 사월조에 ‘여소학성(女小學成)’이라 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이 책이 1882년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호산의 친필본은 화재로 소실되었고, 그의 후손이 필사한 것으로 보이는 두 이본만이 남아 있다. 하나는 1897년 아세아문화사에서 출판한 『호산집』의 제 사책에 영인되어 있는 여소학의 저본이 그것인데 호산의 후손이 소장하고 있다. 또 하나는 홍윤표의 소장본이다.

이 두 이본은 거의 차이가 없으며 필체까지도 동일하다. 단지 차이점이 있다면, 홍윤표소장본은 한문 원문에 주서(朱書)로 점을 찍어 놓고, 그 난상에 한글로 구결을 써 놓았다는 점이 있는데 비하여, 아세아문화사영인본은 그러한 좌점(左點)과 구결이 없다는 점일 뿐이다. 이 두 이본은 그 필사년이 각각 다르다. 아세아문화사영인본은 1915년에 필사한 것으로 보이고, 홍윤표소장본은 1932년에 필사한 것으로 보인다.

제1책의 앞에 제사(題辭), 목록(目錄)이 있고, 권1의 본문이 이어진다. 제6책의 뒷부분에 여소학발(女小學跋)과 후발(後跋), 그리고 자훈방언동이고(字訓方言同異考)가 들어 있다.

그 편찬형식은 매우 특이하여 앞에 원문인 한자를 쓰고 그 한자 하나하나의 아래에 일일이 모두 한글로 석음을 달고 그 원문의 다음에 한글로 언해를 하였다. 원문에는 한자와 그 석음을 달았지만, 언해문은 순수히 한글로만 썼다.

이와 같은 형식은 동경대학본 『백련초해』와 거의 동일한 형식이 되는 셈이다. 또한 이와 같은 형식의 언해방식은 대개 부녀자를 대상으로 한 문헌에서 흔히 발견된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에는 한자음만을 달아 놓는 것이 일반적인데(예컨대 『여훈언해』 등), 이 책은 한자 하나하나에 모두 석음을 달고 있어서 매우 특징적이다. 그런데 그 석음도 규범적인 석음을 달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문맥에 따라 다르게 달고 있는 점이 특히 주목된다.

이 책에 인용된 문헌은 『주역(周易)』·『좌전(左傳)』·『국어(國語)』·『사기(史記)』·『내훈(內訓)』·『예기(禮記)』·『여계(女誡)』·『소학집해(小學集解)』·『모시(母詩)』·『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소학언해(小學諺解)』·『오륜행실(五倫行實)』·『안씨가훈(安氏家訓)』·『논어(論語)』 등 고거제서(考據諸書)가 대단히 많다.

이 책에 쓰인 한글표기는 19세기 말의 회인군 지역어를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에 한글로 표기되어 있는 한자의 석음과 언해문은 19세기 말의 충배방언을 반영하고 있어서, 국어사적인 면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홍윤표소장본은 1990년에 홍문각에서 영인하였다.

참고문헌

「박문호전서(朴文壺全書) 해제」(류정기, 1987, 『호산전서(壺山全書) 영인본』 제일책, 아세아문화사)
「여소학연구(女小學硏究)」(이수봉, 『호서문화』 6, 1988)
집필자
홍윤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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