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행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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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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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연경사행(燕京使行)을 통해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이루어졌던 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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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 연경사행(燕京使行)을 통해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이루어졌던 무역.
내용

청나라 세조(世祖)가 중원에 입관(入關)하기 이전인 1637년(인조 15)부터 1644년까지의 조선 사신은 당시의 청나라 수도인 심양(瀋陽)에 왕래하였다. 이후 1645년부터는 의주(義州)에서 압록강을 건너 책문(柵門)·봉황성(鳳凰城)·요양(遼陽)·우가장(牛家莊)·광녕(廣寧)·영원위(寧遠衛)·산해관(山海關)을 거쳐 연경(燕京)으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1665년(현종 6) 심양에 성경부(盛京府)를 설치한 뒤에는 요양에서 십리보(十里堡)를 거쳐 심양에 들르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1679년(숙종 5)에 청나라가 우가장에 설보(設堡)한 뒤부터는 국방상의 기밀을 유지하기 위해 우가장 통과를 금하였다. 이로써, 사행은 성경부에서 변성(邊城)·거류하(巨流河)·자기보(自旗堡)·이도정(二道井)·소흑산(小黑山)·광녕을 거쳐 연경에 들어갔다.

1645년(인조 23) 조선과 청국 정부간에 약정한 사행의 정관(正官)은 절행(節行)과 별행(別行)을 막론하고 사(使) 2인 혹은 1인, 서장관 1인, 대통관(大通官) 3인(首譯堂上官 1인, 上通事 2인), 압물관(押物官) 24인 등 모두 30인이었다.

그런데 이 30인의 정관은 만약 단사(單使)일 경우 압물관의 수를 25인으로 늘린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정원의 충수(充數)는 먼저 역관(譯官)들을 직차에 따라 배정하고 난 뒤에 의원(醫員)·사자관(寫字官)·화원(畵員)·군관(軍官) 등을 직품(職品)의 순위에 따라 충액한다고 규정하였다.

이 밖에 삼사(三使)와 역관에 허용한 일정수의 마부(馬夫)·노자(奴子) 및 마필(馬匹)과 공물(貢物)을 운반하는 구인(驅人) 등 일행의 총수는 적을 때는 300여 명, 많을 때는 500여 명을 초과하였다. 마필 또한 이에 상당한 수가 가게 되었다.

이 사행이 연경을 왕래할 때 공물과 인마를 직접 관장한 것은 대통관 3인과 압물관 24인 등 모두가 역관들이었다. 동시에 역관은 이 수백 명의 마부·노자 등과 수백 필의 말을 그들의 사무역품(私貿易品) 운송에 가담시킴으로써 원거리 상업 행위를 가능하게 하였다.

이와 더불어 역관들에게는 팔포무역권(八包貿易權)과 함께 관아무역인 별포무역(別包貿易)을 대행하게 함으로써 사무역 활동을 조장하였다. 여기에 더해 부연역관(赴燕譯官)은 많은 관은(官銀)을 융통하면서 연경을 오가며 거의 자유로운 무역 활동을 전개함에 따라 사절 일행을 대상(隊商)의 행렬로 변모시켜 갔다.

이들이 연경으로 가져간 물화는 주로 은(銀)이었고, 수입품은 백사(白絲) 등의 비단이었다. 수입품 중 일부는 경중에서 소비되었으나 대개가 왜관을 통해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이를 통해 역관들은 대청왜중계무역(對淸倭中繼貿易)으로 엄청난 재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숙종 때 서울의 거부인 변승업(卞承業) 일가의 경우는 이러한 사정을 설명해 주는 일례이다. 그러나 부연역관의 중계무역은 청나라가 1684년 해금(海禁)을 해제한 뒤 40∼50년이 지나면서는 몰락해 가기 시작하였다.

한편, 이보다 앞서 역관에 의한 중계무역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17세기 초·중엽 국내 상공업의 발전과 사상인(私商人)의 성장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이들 사상인에 의한 대청무역은 이미 병자호란 이후 중강개시(中江開市)·회령개시(會寧開市)·경원개시(慶源開市) 등 양국 관헌의 감시하에 행해진 공무역(公貿易)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행에 침투해 대청무역로를 개척하기 시작하였다. 그 중의 하나는 역관과 결탁해 사행 중의 마부·노자·구인의 이름으로 부연하는 경우였다. 사행에 따르는 수백 명의 마부나 노자 등도 특별한 경우를 빼놓고는 30명의 정관이 사적으로 대솔(帶率)하는 인마(人馬)와 방물·세폐의 운송 인마를 구분해 일정수가 정해져 있었다.

그리고 출발과 동시에 국내의 역로에 보내는 선문(先文) 또는 노문(路文)과 청나라 내지의 관액(關阨)에 보고하는 보단(報單)에 인마의 수가 자세히 기록되었고, 관헌의 엄격한 검열을 받아야만 하였다. 이상과 같은 사상인의 대청무역 참여의 또 하나의 기회는 무역별장제(貿易別將制)였다.

사상인 중에도 일부 유력한 자들은 거주 지역의 관아에 정부가 공인한 정액의 팔포무역을 대행하는 무역별장(貿販別將이라고도 함.)에 차정(差定)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상과 같이 사상인이 역관의 노자·마부 또는 지방 관아의 무역별장으로 대청무역에 참여하는 길은 그 기회를 포착하기가 어려웠다. 뿐만 아니라 그 수 또한 얼마 되지 않았다.

그 보다 대다수의 사상인이 참여할 수 있었던 기회는 무엇보다도 여마제(餘馬制)·연복제(延卜制)에 편승하는 길이었다. 다시 말하면, 서울·개성 상인을 위시해 황해도와 평안도의 많은 사상인들이 침투할 수 있었던 기회는 사행이 책문을 들고 날 때의 여마·연복에 끼어드는 방법이었다.

이러한 사상인의 비합법적인 잠무역이 팔포 정액에 의한 무역보다도 번창했기 때문에 통칭 후시라 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책문에서 이루어졌으므로 책문후시(柵門後市)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한편, 역관들의 대청·왜 중계무역에는 하나의 커다란 위기가 싹트고 있었다.

그것은 곧 청일 양국의 직접적인 무역이 재개되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1707년(숙종 33) 책문후시가 사상인에 개방된 뒤 청나라의 상품은 이들에 의해 대량으로 수입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국내의 상조직을 타고 도회지뿐만 아니라 농촌의 향시(鄕市)를 통해 심산궁곡(深山窮谷)에까지 침투하고 있었기 때문에 역관의 국내 판매는 어렵게 되고 말았다.

여기에 이르자 역관들은 사상인의 무역로를 봉쇄하는 데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그리고 실현 방법으로 사신을 통해 사상 무역 봉쇄의 정당성을 정부에 반영시킴으로써 1725년(영조 1)에는 연복제에 편승한 사상인의 책문무역을 중단하게 하였다.

그리고 다음에는 지방 관부의 무역별장에 의한 심양 팔포무역과 단련사제도(團練使制度)를 1728년에 혁파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조처로써 책문무역 곧 사상인의 대청무역은 완전히 봉쇄되고, 다시 원점으로 환원해 부연역관에 의해서만 이루어지게 되었다.

역관에 의해 사상인의 대청무역이 완전히 봉쇄되자 손해를 입게 되는 각 관아와 상인들의 반발이 매우 컸으며, 여기에 대한 정부의 조처도 강력하였다. 그러나 17세기 후반, 18세기 중엽의 국내 상품 화폐경제의 발전과 사상인의 성장은 대청무역을 쉽게 중지할 수 없었다.

수백, 수천에 달하는 수출입상품의 마태(馬駄)가 드나들던 책문후시가 막히자, 이제 사상인들은 법금(法禁)을 무릅쓰고 국경지대나 해안선에 접근해 밀무역을 감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의 유명한 밀무역장소는 압록강변의 의주·강계·초산·창성(昌城)·삭주(朔州)·위원(渭原)·벽동(碧潼) 등 강변7읍과 이산진(理山鎭)·고산진(高山鎭)·만포진(滿浦鎭)을 비롯해 서해안과 회령 등지였다.

이로 인해 사상인들의 대청무역은 비합법적인 잠상행위로 전환되었다. 그리고 정부는 범월사건(犯越事件)이 우려될 뿐 아니라 재정적인 손실도 컸기 때문에 1754년에는 “만부(灣府 : 義州府)의 빚을 탕감하는 일과 변민(邊民)의 편안한 생활을 위해서”라는 명분하에 연복에 의한 책문무역을 비로소 공인하였다.

그러나 사상인에 의한 만상후시가 성행하자 다시 역관에 의한 반발로 1787년(정조 11)에 혁파되었다. 이후 후시를 회복하려는 상인들의 극심한 반발에 부딪쳐 1795년에 재개되었다. 이와 같이, 연행무역에서의 역관들의 무역 활동은 1720∼1730년대를 전환기로 하여 쇠퇴하였다.

그리하여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일부 부유한 역관들을 제외하면 팔포 정액마저 채울 길이 없어 만상에게 포과(包窠)를 팔게되는 실정이었으며, 반면에 사상인의 대청무역은 활발히 전개되어 갔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연행소고(燕行小攷)」(김성칠, 『역사학보』 12, 1960)
「조선후기 대청무역(對淸貿易)의 전개과정」(류승주, 『백산학보』 8, 1970)
집필자
유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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