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암은 조선시대 병조참판, 전주부윤, 전라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541년(중종 36)에 태어나 1600년(선조 33)에 사망했다. 1558년 진사시에 입격하고 1561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전라도도사를 역임하며 치적을 올렸고, 연안부사에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의병을 모집하여 치열한 전투 끝에 연안성을 지켜냈다. 1604년 연안을 수비한 전공으로 선무공신 2등에 책록되었으며, 월천부원군에 추봉되고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상례초』·『독역고』·『왜변록』·『서정일록』·『사류재집』 등이 있다.
1558년 (명종 13)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되고, 1561년(명종 16)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처음 승문원에 들어가 권지부정자를 역임하고 예문관검열로 사관을 겸하였다. 1565년 승정원주서를 거쳐 1567년(선조 즉위년) 성균관전적 · 공조좌랑 · 예조좌랑 · 병조좌랑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이듬해 외직인 전라도도사를 역임하면서 치적을 올렸고, 이어 중앙으로 돌아와 형조좌랑을 거쳐 다시 함경도도사로 나갔다.
1569년 경기도도사로 옮겼다가 경직인 춘추관기주관이 되었고, 이듬해 형조좌랑에 재임용되어 지제교를 겸하였다. 그러다가 다시 병조정랑으로 옮겨 강원도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재해 지역을 살피고 돌아와 정언을 역임하였다. 1571년 예조정랑 · 사헌부지평으로 춘추관의 직책을 겸임하고 『명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경기도경차관(京畿道敬差官)으로 재해 지역을 살피고 돌아왔다.
1572년 성균관사예에 임명되어 춘당대 친시(春塘臺親試)에 참시관(參試官)으로 입시하였다. 그해 여름 연안부사가 되어 군적(軍籍)을 다시 정리했으며, 선정을 베풀어 부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1576년 장단부사를 거쳐 1578년 제용감정(濟用監正) 등을 역임하였다. 다음해 양주목사로 나가 도봉서원(道峰書院)과 향교를 중수하고, 전안(田案)을 개혁, 대동법을 실시해 번잡한 역(役)을 없애는 등 크게 치적을 쌓았다.
1580년 평산부사를 거쳐 1584년 장령 · 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1587년 동래부사가 되어 내왕하는 일본인들의 폐단을 근절시켰다. 1591년 첨지중추부사 · 장례원판결사 · 승지 · 공조참의 · 병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날 때 이조참의로 있었는데, 선조가 평안도로 피난하자 뒤늦게 호종(扈從)했으나 이미 체직되어 소임이 없었다.
아우인 개성유수 이정형과 함께 개성을 수비하려 했으나 임진강의 방어선이 무너져 실패하고 말았다. 그 뒤 황해도로 들어가 초토사(招討使)가 되어 의병을 모집해 연안성(延安城)을 지킬 것을 결심하고 준비 작업을 서두르던 중 도내에 주둔한 왜장 구로다〔黑田長政〕가 5,000∼6,000명의 장졸을 이끌고 침입하자, 주야 4일간에 걸친 치열한 싸움 끝에 승리해 그 공으로 황해도관찰사 겸 순찰사가 되었다.
1593년 병조참판 · 전주부윤 · 전라도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1596년 충청도관찰사가 되어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죄수를 임의로 처벌했다는 누명을 쓰고 파직되었다가 다시 지중추부사가 되고, 황해도관찰사 겸 도순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해서초토사(海西招討使)로 해주의 수양산성(首陽山城)을 지키기도 하였다. 난이 끝나자 풍덕에 은퇴해 시문으로 소일하다가 몇 년 뒤에 죽었다.
1604년 연안 수비의 공으로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에 책록되었으며, 월천부원군(月川府院君)에 추봉,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성혼(成渾) · 이제신(李濟臣) 등과 교유하였다. 연안 현충사(顯忠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상례초(喪禮抄)』 · 『독역고(讀易攷)』 · 『왜변록(倭變錄)』 · 『서정일록(西征日錄)』 · 『사류재집』 등이 있다. 시호는 충목(忠穆)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