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휘는 조선후기 『동사』, 『수산집』 등을 저술한 학자이다. 1731년(영조 7)에 출생하여 1797년(정조 21)에 사망하였다. 자는 덕숙이고 호는 수산이다. 조선 후기 양명학자로서 주자학의 폐쇄성을 비판하였으며, 『동사(東史)』를 저술하였다. 『동사』에서는 단군에서 후조선으로 이어지는 민족의 기원을 확인하고 부여, 발해를 중시하여 만주 땅을 고토(故土)로 인식하였다. 특히 고구려를 역사 계승의 중심축으로 삼아서, 도학적 역사관의 중화주의적 의리사관과 구별되는 민족사관의 단초를 볼 수 있다. 문집으로 『수산집』이 있다.
이종휘의 개인적 기록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우나, 집안이 소론 계열에 속하며, 양명학 학풍에 친밀한 분위기였음을 알 수 있다. 공주판관(公州判官)을 지낸 적이 있다.
이종휘의 학문적 기본 입장은 주자학의 폐쇄성을 벗어나 양명학을 적극적으로 긍정함으로써 학문적 기초를 확보하고 있다. 이종휘는 우주가 생겨난 이래 가장 탁월한 명사(名士)로 장량(張良) · 제갈량(諸葛亮) · 왕수인(王守仁)의 세 사람을 들고 있으며, 왕수인은 재주에서는 제갈량에 견줄 만하고, 공적에서는 장량과 비슷하며, 지조에서는 가장 뛰어났다고 극찬하였다.
이종휘는 육왕학(陸王學)이 오랫동안 단절되었던 심학(心學)을 이어왔음을 지적하고, 정주학(程朱學)이 실천에서는 육왕학에 못 미치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한편 이종휘는 『대학』을 잘못 읽었다는 것을 왕수인의 문제점으로 지적함으로써, 『대학』 해석에서는 주희(朱熹)가 옳고, 심학에서는 왕수인이 정당한 것으로 양면적 긍정을 하고 있다.
이종휘는 이 시대 유학의 가장 큰 사업은 주자학과 양명학 사이의 입문(入門)과 통로[路脈]를 변별(辨別)하는 것이라 강조함으로써, 주자학과 양명학을 객관적으로 공정하게 인식할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제자백가의 서적이 있음으로써 사서(四書)의 훌륭함이 드러나는 것처럼, 육구연(陸九淵) · 왕수인의 심학이 있음으로써 정주학이 드러나는 것이라 하여, 정통주의적 정주학이 다른 모든 사상을 이단으로 배척하는 폐쇄적 태도의 잘못을 비판하였다.
이종휘의 심학은 양지(良知) · 근독(謹獨) · 성(誠)의 개념들이 기초를 이루고 있으며, 양명학적 역사관에 기초한 역사 연구를 통해 독자적인 사학체계(史學體系)를 제시하였다. 이종휘는 사학[史]과 경학[經]이 표리 관계를 이루며, 서로 날실[經]과 씨실[緯]로 짜여져 하나의 경사(經史)를 이루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홍양호(洪良浩)는 이러한 이종휘의 학문 체계에 대하여 경술(經術)을 체(體)로 삼고 문장과 사학(史學)을 용(用)으로 갖추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는 한쪽에만 치우쳐서 학문의 전체성과 균형성을 잃어버린 편협함의 오류를 탈피한 것이었다.
또한 이종휘는 옛 역사를 지나간 역사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나로 말미암아 더욱 빛나는 것이요, 내 마음으로 말미암아 더욱 값지게 전달되는 것임’을 역설하여 역사 인식에서 주체적 정당성을 중시하였다.
대표적 역사 저술인 『동사(東史)』에서는 전통적 역사관을 받아들이면서도, 이를 매우 창의적으로 응용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단군 · 기자 · 삼한 · 후조선으로 이어지는 민족의 기원을 확인하고, 부여 · 발해를 중시하여 만주 땅을 고토(故土)로 인식하였다. 특히 고구려를 역사 계승의 중심축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에서 도학적 역사관의 중화주의적 의리사관(義理史觀)과 구별되는 민족사관의 단초를 볼 수 있다.
또한 역사와 지리를 결합하여 해석하고 고증해감으로써 실학파 역사 연구의 일환으로 중요한 업적이 되었다. 신채호(申采浩)는 이종휘의 역사 인식에 대하여 “단군 이래 조선의 고유한 독립적 문화를 노래했으며, 김부식(金富軾) 이후 사가(史家)의 노예사상을 갈파하였다.”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이종휘는 사회적 모순에 대한 위기의식을 지니고 있었으며, 옛 습속을 개혁하고 국가의 미약한 세력을 강하게 바로잡는 개혁론적 관심, 그리고 과거제도 · 변경방어 등 제도의 개혁을 추구하는 실학적 사회의식을 보여주었다. 문집으로는 『수산집(修山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