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사는 조선 후기 학자 이종휘가 본기, 세가, 열전, 연표, 표, 지로 구성된 기전체 형식으로 서술한 역사서이다. 이종휘의 문집인 『수산집(修山集)』 안에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고조선과 삼한, 부여, 고구려 계통의 역사와 문화를 다루고 있다. 특이한 점은 단군 신앙의 내력을 독립적으로 신사지(神事志)라는 항목에 정리한 것이다. 이를 통해 부여·예맥·비류·옥저·고구려·백제 등을 단군의 후예로 간주하여 단군의 혈통과 문화적 위치를 격상시켰다. 또한 발해를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로 설정하여 발해사를 확실하게 한국사로 편입시켰다.
『동사』는 기전체형식에 따라 본기(本紀) · 세가(世家) · 열전(列傳) · 연표(年表) · 표(表) · 지(志)로 구성되어 있는데, 고조선과 삼한, 그리고 부여 · 고구려 계통의 역사와 문화를 다룬 것이 특징이다.
지은이가 고대사에 주로 관심을 둔 것은 우리 고대의 문화와 영토에 대한 자부심 때문이었다. 즉 청나라가 중원의 지배자가 된 이후 중국에는 이미 중화(中華)의 전통이 끊어졌고 오직 우리나라만이 중화의 문화를 간직한 선진국가라는 인식하에, 이미 단군 · 기자 때부터 중국의 삼대(三代)와 같은 문화가 형성되어 고구려 · 발해로 이어져 온 것으로 재구성하였다.
지은이는 이 책에서 부여 · 고구려 · 백제 · 예맥 · 옥저 · 비류 등을 모두 단군의 후예인 것으로 간주하고, 발해 또한 고구려의 후계자로 인정함으로써 이들이 만주에 세웠던 나라들이 본래 우리의 강토였음을 분명히 해 두고자 하였다.
또한 고려 때 윤관(尹瓘)이 개척한 9성(九城)도 그 최북단인 선춘령(先春嶺)은 두만강 북쪽 700리에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아울러 요수(遼水)를 우리나라의 8대 강 중에 포함시킴으로써 요하 동서지방도 우리 강역 안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만주를 잃은 고려 이후의 강토도 3,000리가 아니라 제주도까지 포함하면 지방(地方) 6,000리라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이러한 강토 속에 우리 역시 중국과 마찬가지로 기후와 풍토의 다양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지리적 측면에서도 중화국가로 자부하는 데 손색이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지은이가 구성한 한국사는 중국 주변의 조그만 제후국가로서의 역사가 아니라, 중국과 마찬가지로 천하를 포용하는 역사인 것이다. 그래서 단군 · 기자 · 위만조선을 3조선이라 하여 3황(三皇)에 대비되는 당당한 국가로 인정하며 이를 본기(本紀)에 넣고, 부여 · 옥저 · 비류 · 예맥 · 삼한 등도 고조선에 신속(臣屬)한 나라로 보아 고조선의 역사적 위치를 격상시켰다.
특히 삼한을 단군 · 기자조선에 신속한 나라로서 생민(生民)의 초기부터 있었다고 한 것은, 삼한을 중국의 유망민 집단으로 해석하고 기준(箕準) 이후부터 마한이 성립하였다고 보는 통설과는 다른 것이다.
다만, 위만에게 쫓겨난 기준이 남쪽으로 내려와 마한왕이 되었다는 것은 긍정했으며, 마한이 삼한의 맹주로서 54국을 거느리는 대국이었다는 점에서 삼한을 삼한본기로 서술하고 이를 후조선본기(위만조선) 앞에 배치하였다. 이는 위만조선의 성립보다도 삼한의 성립이 앞선 것으로 본 까닭이다.
한사군의 문제는 역사체계에서 삭제하였다. 이는 한사군이 낙랑을 제외하고는 모두 요좌(遼左)에 있었을 뿐 아니라 부여 · 예 · 맥 · 옥저 · 비류 · 낙랑국 등 여섯 개의 큰 나라들이 병립해 있었고, 한반도 남쪽에는 삼한의 78국이 엄존하여 있었기 때문에 역사의 단절로 해석되지 않았다.
지은이는 고대국가의 강역에 관한 위치비정에 있어 대체로 선배 소론학자인 임상덕(林象德)의 설을 따랐다. 특히 삼한의 위치를 황해도 이남으로 본 것이나 그 밖에 비류 · 대방 · 패수 · 환도 · 졸본 등의 위치 고증은 임상덕의 설을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다.
지은이의 역사인식은 유학자의 시각에 바탕을 두고 있으면서도 당시 유학자들 사이에 유행하던 사체(史體)인 강목법(綱目法)과 정통론(正統論)을 따르지 않았으며, 또 유학자의 시각에서 볼 때 미신으로 간주되던 귀신 숭배의 전통을 신사지(神事志)라는 독립된 항목을 두어 정리한 것이 특이하다.
이 신사지에는 환웅, 즉 신시천왕(神市天王)이 이신설교(以神設敎)한 이후, 마니산의 참성단과 강화도의 삼랑성, 구월산의 삼성사(三聖祠), 고구려의 동맹(東盟), 신라의 성모사(聖母祠), 그리고 삼신산(三神山)에 대한 신앙 등으로 이어져 내려온 내력이 기술되어 있다.
또한 유학자들이 대체로 황당무계한 것으로 배격하던 고기(古記)의 기록들을 상당 부분 채용하여 단군을 환씨(桓氏)로 호칭하고, 백성들에게 편발(編髮)과 개수(蓋首)를 가르치고 군신 · 남녀 · 음식 · 거처의 제도를 마련하였으며, 팽오(澎吳)에게 명하여 산천과 백성의 거처를 정했고, 아들 부루(夫婁)를 도산(塗山)에 보내 하(夏)나라 임금 우(禹)를 만나게 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단군을 수출성인(首出聖人)으로 격상시킨 것도 이와 같이 단군시대의 문화를 긍정적으로 해석한 데서 가능했던 것이다.
이종휘의 역사의식은 『동사』에 집중적으로 반영되는데, 그가 드러내어 강조하고자 한 역사상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① 부여 · 예맥 · 비류 · 옥저 · 고구려 · 백제 등을 단군의 후예로 간주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뿌리에 있어서 단군이 차지하는 혈통 및 문화적 위치를 격상시켰다.
② 발해를 말갈계통으로 인식해온 일부 학자들의 견해를 따르지 않고 이를 고구려 유민에 의해 성립된 국가로 설명함으로써 보다 확실하게 발해사를 한국사로 편입시켰다.
③ 우리나라의 고대문화는 기자로부터 중국의 이상시대인 3대의 문화가 유입되어 소중화로서의 높은 문명단계로 진입했고, 이어 삼한 · 고구려 · 발해로 이어짐으로써 우리는 명나라의 멸망 이후 동아시아 세계에서 유일하게 중화국가라 자부할 수 있는 문화국가가 되었다.
④ 압록강 이남으로 축소된 이후의 우리나라 강토도 제주도까지 포함시켜 볼 때 폭원(幅員)은 1만 리에 이르고 지방(地方)은 6,000리에 이르므로 결코 소국이 아니며, 그 안에는 중국이 갖추고 있는 기후 · 풍토 · 산물의 다양성이 있어 하나의 독립된 천하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당연히 우리 역사도 중국천자만이 칭하던 본기라는 서술방식을 따를 수 있다.
⑤ 미래의 과제로는 단군 이래 우리의 영토였던 만주지방, 특히 요심(遼瀋)지방을 다시 수복함으로써 문화적인 면에서의 소중화로서 그칠 것이 아니라 영토면에서도 대국으로 부상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