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 초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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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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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 이채(李采,1745-1820)를 그린 초상화.
내용 요약

이채 초상은 조선 후기의 문신 이채(1745-1820)를 그린 초상화이다. 2006년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심의를 입고 동파관을 쓴 뒤 두 손을 모으고 정면을 바라보는 반신상이다. 이 초상은 수려한 용모를 뛰어난 화법으로 묘사하고 있다. 당대 명필들의 미려한 글과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다. 왼쪽에 유한준의 찬문(서화를 기리는 글)이 있다. 조선 후기 초상화는 정조대 중엽 전후에 가장 정교한 기법을 구사하였다. 이 초상화는 1802년에 그려진 것으로 조선 후기 초상화 중 가장 아름다운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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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이채(李采,1745-1820)를 그린 초상화.
구성 및 형식

2006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1802년 작. 비단 바탕에 채색. 세로 99.2㎝, 가로 58㎝. 이채의 영정은 무색 심의(深衣 : 높은 선비의 웃옷)를 입고 중층 정자관(程子冠)을 쓴 뒤 두 손을 공수(拱手 : 두 손을 마주 잡음)한 채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반신상이다.

수려한 용모를 뛰어난 화법으로 묘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당대 명필들의 미려한 찬문(讚文)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더욱 고아한 분위기를 부여해 준다. 조선 후기 초상화 중 가장 아름다운 걸작이다.

내용

「이채 초상」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이재 초상」과 주인공의 용모와 복장이 유사하여 동일한 인물로 보는 의견도 있다. 이재 상을 그린 후 10여 년 후 다시 그린 초상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용모에 일부 일치하지 않는 부분도 있어 할아버지 이재(李縡)와 손자 이채의 초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반론이 있다.

흔히 1807년 작으로 잘못 알려져 있다. 하지만 오른쪽에 이채의 자제문(自題文)을 썼던 경산(京山)이한진(李漢鎭)이 “망팔(望八 : 71세)”에 쓴다고 하여 1802년에 썼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이채의 『화천집(華泉集)』에 실린 동일 내용의 「초상에 제함(題眞像)」에도 “임오(壬戌)”라고 주를 달아 1802년에 썼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이 초상화는 1802년 이전에는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초상화에 자찬문을 쓰던 통상적인 관례에 의하면 1802년에 그린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이다. 왼쪽에 유한지(兪漢芝)가 예서로 쓴 유한준(兪漢雋)의 찬문에서 이채의 59세 모습이라던가 72세에 찬을 지었다고 기록한 데서 나타나는 1803년, 그리고 송원(松園)이 쓴 “정묘(丁卯)”의 1807년은 뒤에 찬문을 추가했던 해로서 초상화의 제작 시기와는 무관하다.

찬문의 전체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자관(程子冠)을 쓰고 주문공(朱文公)의 심의(深衣)를 입고 꼿꼿하게 앉아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눈썹은 짙고 수염은 하얗고 귀는 높고 눈은 밝은 그대가 진정 이계량(李季良)인가? 그 벼슬살이를 살펴보면 세 곳의 현(縣)과 다섯 곳의 주(州)를 다스렸고, 그 공부한 것을 물어보면 사서(四書)와 육경(六經)이니 당대를 속이고 허명(虛名)을 훔친 사람이 아닌가? 아! 그대 선조의 고향으로 돌아가 그대 할아버지[도암(陶菴) 이재(李縡)]의 책을 읽는다면, 그 즐거움을 알아 정주(程朱)의 무리가 되어도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화천옹(華泉翁) 이채가 직접 글을 짓고, 팔순을 바라보는 늙은이 경산(京山) 이한진(李漢鎭)이 쓰다.[彼冠程子冠 衣文公深衣 嶷然危坐者誰也歟 眉蒼而鬚白 耳高而眼朗 子眞是李季亮者歟 考其迹則三縣五州 問其業則四子六經 無乃[歟]欺當世而竊虛名者歟 吁嗟乎 歸爾祖之鄕 讀爾祖之書 則庶幾知其所樂而不愧爲程朱之徒也歟 華泉翁自題 京山望八翁書]“

조선 후기 초상화는 정조대 중반경 전후 무렵에 가장 정교한 기법을 구사하며 정점에 올랐다. 정조대 후반을 넘어 1802년에 그려진 이 초상화는 한편으로 더욱 정치해지기도 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서히 경화되고 거칠어지기 시작하는 과도기의 복합적인 모습을 잘 보여 준다.

심의와 복건 및 정자관은 이재(李縡), 윤봉구(尹鳳九), 김원행(金元行), 김이안(金履安)의 초상화에서 보듯 성리학자들이 평소 법복(法服)처럼 착용하던 복장이다. 영조대 서울 성리학계를 대표했던 조부 이재의 가학 계승을 자임(自任)하고 자부했던 이채로서는 스스로 이를 되새긴다는 특별한 의미가 내함되어 있는 도상으로서 더욱 이와 같은 모습을 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18세기 전반경과 달리 정자관의 테두리 안에 진채(眞彩 : 진하고 강하게 쓰는 채색) 안료로 청색의 선묘(線描 : 선으로만 그림)를 삽입하였다. 또한 허리띠에 덧매어 늘어뜨린 술띠도 폭이 넓다. 뿐만 아니라 적황녹청(赤黃綠靑)의 진채로 화려한 문양을 강조하는 변화가 나타난 것은 정조대 이후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장식적 취향이 반영된 결과이다. 이층의 높은 정자관은 먹보다도 짙은 흑색 안료를 사용하여 말총으로 짜여진 올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묘사하였다. 그 뒤 내부 전체를 중묵으로 우려서 정자관의 검고 반투명한 특징을 표현했다. 이처럼 치밀하고 정교한 묘사는 정조대의 전성기 초상화 전통이 더욱 발전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칠흑같이 검고 정교하며 엄격한 정자관은 화면 하부의 부드러운 흰색 심의와 강한 대조를 이룬다. 그러면서 화면 전체를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시각적 작용을 하고 있다. 나아가 정치하고 무겁게 묘사된 얼굴 부분과도 매우 조화로운 호응을 이루면서 상보 상생(相補相生)하는 효과를 얻고 있다.

심의의 깃에 덧댄 검은 선(縇)도 흑색 안료를 사용하여 칠했다. 목과 가슴 부분은 그 형태를 약간 둥그렇게 굴린 다음 가장 도드라진 가슴 부분을 미세하게나마 조금 옅게 칠해서 입체감에 따른 명암의 변화까지 표현했다. 이것도 정조대 이래 특히 발달했던 정교한 명암법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심의에 호분(湖粉 : 흰 가루)을 배채하여 흰색이 은은하게 드러나도록 하였다. 그리고 어깨 부분의 배경을 담묵(淡墨 : 진하지 않은 먹물)으로 엷게 우림으로써 신체가 더욱 도드라지게 하였다.

한편 초상이 비단과 완전히 분리되는 듯한 느낌을 완화시키는 이중적 효과를 내고 있는 것도 정조대 전성기 초상화의 여맥을 계승한 면모이다. 그러나 몇몇 부분에 있어서는 정조대의 전성기 초상화와 달리 다소 퇴화된 모습도 나타나 있다.

물기가 많은 담묵의 먹선으로 잡은 옷주름이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채 거의 눈에 보이는 그대로 묘사되었다. 그래서 다소 산만하고 어수선한 느낌을 줌으로써 전성기의 절제되고 긴장되며 세련된 미감이 퇴화되었다. 또한 필선이 형태에 지나치게 종속되어 필세가 약화됨으로써 필선으로서의 자율성이 감소되었다.

옷주름 주변의 명암 표현에서도 다소 퇴화된 모습을 볼 수 있다. 정조대의 전성기 초상화에서는 옷주름이 접혀 올라와 도드라진 부분을 그 바깥쪽 주변까지 엷게 우려서 매우 입체적으로 표현했었다. 이와 달리 이 초상화에서는 옷주름의 안쪽 부분만 담묵으로 우려서 표현하는데 그쳤다.

얼굴 표현에 있어서도 분홍색을 배채하고 윤곽선과 주름선을 거의 필세가 없는 갈색 필선으로 그렸다. 그 다음 붓끝에 물기가 적은 갈색을 살짝 묻혀서 수없이 많은 단선(短線)으로 마치 쓸듯이 혹은 비벼 대듯 명암을 넣는 필묘법(筆描法)을 구사하였다. 이러한 표현은 기본적으로 정조대의 전성기 초상화 기법과 같다. 그리하여 정면관(正面觀 : 앞에서 바라본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얼굴의 윤곽과 특징을 거의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정조대 전성기 초상화의 필묘법은 붓자국이 거의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세했다. 이에 비하여 이채의 초상화는 붓자국이 다소 거칠게 드러나 있어 묘법이 조금은 소략해졌다. 다만 전체적으로 보면, 심의의 다소 해이한 듯한 옷주름 묘사가 한편으로는 초상화에 넉넉하고 여유 있는 맛을 부여해 주기도 한다. 그리고 얼굴의 다소 거친 듯한 필묘법은 오히려 정치한 명암 표현 속에서도 어떤 손맛 같은 정취를 느끼게 해 주는 또 다른 회화적 묘미가 없지도 않다.

비단은 올이 곱고 촘촘한 통견을 사용했는데 아교와 백반을 많이 올려 다소 반짝이는 편이다. 근래 유리 액자로 개장되어 조선시대의 족자 표구 모습은 상실한 상태이다.

참고문헌

『화천집(華泉集)』
『한국의 초상화 : 역사 속의 인물과 조우하다』(문화재청, 눌와, 2007)
『한국의 미 특강』(오주석, 솔, 2003)
「털과 눈 :조선시대 초상화의 제의적 명제와 조형적 과제」(강관식, 『미술사학연구』248, 한국미술사학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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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강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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