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세 때 백부인 진사공(進士公) 이희생(李喜生)에게 공부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희생은 조식의 문인록에 이름이 올라있는 인물이다. 28세에 이희생의 초상, 이어지는 조부모의 초상으로 인해 30세 전에 과거 시험을 보지 못하였다. 32세인 1588년(선조 21)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모친상이 있었다. 38세 되던 1594년(선조 27)에 대과에 응시하였다가 낙방한 후 더 이상 과거 공부를 하지 않았다.
임진왜란으로 피난을 갔다가 43세인 1599년(선조 32) 봄에 고향인 합천 대평리(大坪里) 회향촌(回鄕村)에 돌아와 희정당(喜靜堂)을 지었다. 44세인 1600년(선조 33) 여름에 남산 아래에 죽정(竹亭)을 지어 학문에 정진하였다. 이해에 노흠이 임곡(林谷) 임진부(林眞怤)와 창주(滄洲) 허돈(許燉)을 그에게 보내서 배우게 하였다. 45세인 1601년에는 비암서당(鼻巖書堂)을 지어 후학을 양성하였다. 58세인 1614년(광해 6)에는 아들 회일(會一)에게 명하여 동계(桐溪) 정온(鄭蘊)을 변호하는 상소문을 지었다.
62세인 1618년(광해 10)에 큰아들과 맏사위 매죽헌(梅竹軒) 성박(成鑮)이 죽고, 65세인 1621년에 둘째 아들까지 죽자 크게 상심하여 더 깊은 자연, 즉 합천군 봉산면 노파(蘆坡)로 거처를 옮겼다. 현재 이곳은 1987년에 합천댐이 건설되면서 수몰되었다. 68세인 1624년에 합천 삼산(三山)〔지금의 경남 합천〕으로 돌아와 조식의 위패를 봉안한 용암서원(龍巖書院) 원장에 취임하였다. 정인홍과 입재(立齋) 노흠(盧欽)(1527~1601)의 다음 세대에서 남명학파를 이끌면서 임곡(林谷) 임진부(林眞怤, 1586-1657)와 창주(滄洲) 허돈(許燉, 1586-1632) 등 다음 세대로 남명학을 계승하게 하였다.
이흘은 평생 정치적 활동을 한 적이 없고 정치적으로 자기 주장이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당을 만드는 것도 싫어하였다. 평소에 “나는 타고난 성품이 남에게 구속을 당하는 것도 남을 구속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그가 용암서원 원장이 된 때는 인조반정 직후로 서인 세력에게 북인이 전면적인 탄압을 받던 시기였다. 오히려 그의 생애와 성향이 어려움에 처한 남명학을 보존하고 조식의 정신을 이어가는 데는 더 적합하였던 것으로도 보인다.
문집으로 『 노파선생문집(蘆坡先生文集)』이 있다. 처음에는 이흘의 둘째 사위이자 문인인 조임도(趙任道, 1585~1664)가 교정하여 이흘 사후 15년 만인 1641년(인조 19)에 '희정당선생집(喜靜堂先生集)'이라는 이름으로 편찬되었다. 하지만 인조반정 이후 북인의 쇠퇴로 인해서 오랫동안 간행되지 못하였다. 1834년에야 『노파선생문집』으로 이름이 바뀌어 간행되었다.
1691년(숙종 17)에 이흘의 학덕을 기려 사림이 합천 금성산(金城山) 아래에 고암서원(古巖書院)을 세웠다. 여기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