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면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 예조 좌랑 ‧ 서천 군수 ‧ 정언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여강(汝强)
여우(如愚)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14년(광해군 6)
사망 연도
1687년(숙종 13)
본관
해주(海州)
주요 저서
『갑술보(甲戌譜)』
내용 요약

정면(鄭勔)은 조선 후기에 예조좌랑 ‧ 서천군수 ‧ 정언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현종 대에는 국정과 외교에서 절차와 원칙을 강조하였으며, 숙종 대에는 주로 남인에 대한 서인의 언론을 담당하였고, 문묘 배향 인물의 재정비와 계성묘(啟聖廟)의 건립 등을 주장하였다.

정의
조선 후기, 예조 좌랑 ‧ 서천 군수 ‧ 정언 등을 역임한 문신.
가계 및 인적사항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여강(汝强), 호는 여우(如愚)이다. 할아버지는 정호학(鄭好學)이고, 아버지는 정도창(鄭道昌)이며, 어머니는 이도(李蒤)의 딸이다.

주요활동

1649년(인조 27)에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예조좌랑(禮曹佐郎) ‧ 병조좌랑(兵曹佐郎)을 역임하고, 서천군수(舒川郡守) ‧ 영광군수(靈光郡守) ‧ 고부군수(古阜郡守) 등 외직에 있다가 정언 · 장령주1직을 지냈다. 1674년(현종 15)에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승하하자, 주2에는 고부사(告赴使)를 보내지 않는 전례에 따라 고부사를 보내지 말자고 거듭 주장하다가 관직이 교체되었으며, 주3 선발에 뇌물을 받은 전업실(田業實)을 처형하는 안건과 관련하여 절차를 강조하다가 사직을 청하였다.

1680년(숙종 6)에 장령으로 있으면서, 『 현종실록』의 개수, 현종 묘정에 배향되어 있는 조경(趙絅)주4, 신범화(申範華)주5, 율법에 따른 강만철(姜萬鐵)의 처단, 오시수(吳始壽)의 사형 면제, 이빈(李穦)의 주6, 보사공신(保社功臣)의 추록 반대, 허적(許積)주7인 한순석(韓舜錫)의 처벌 등 서인의 언론을 담당하였다.

이듬해에는 명나라의 제도를 따라 계성묘(啟聖廟)를 세워 숙량흘(叔梁紇) 등을 제사 지내고, 양명학을 배척하는 데 공로가 있는 설선(薛瑄)을 문묘에 종사하도록 상소를 올렸으며, 기근에 과다한 논상 정지, 궁가 절수지(折受地)의 폐단, 태조 존호(太祖尊號)의 추상에 반대하였다. 1684년(숙종 10)에 승지로 승진하였으나, 일본(日本)에서 온 서계(書契)의 정보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누출시킨 죄로 파직되었다가 얼마 후 복직되었다.

학문과 저술

해주 정씨 가문의 족보 『갑술보(甲戌譜)』를 편집하였으며, 사후인 1694년(숙종 20)에 아들 정계주(鄭啓周)가 출간하였다.

참고문헌

원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국조방목(國朝榜目)』
『숙종실록(肅宗實錄)』
『현종실록(顯宗實錄)』
주석
주1

조선 시대에, 사간원과 사헌부에 속하여 임금의 잘못을 간(諫)하고 백관(百官)의 비행을 규탄하던 벼슬아치.    우리말샘

주2

아낙네의 초상.    우리말샘

주3

조선 시대에, 여사청(輿士廳)에 속하여 인산(因山) 때에 대여(大輿)나 소여(小輿)를 메던 사람.    우리말샘

주4

종묘나 문묘에 배향한 위패를 거두어 치우던 일.    우리말샘

주5

먼 곳으로 귀양을 보냄.    우리말샘

주6

죄를 지은 자의 벼슬과 품계를 빼앗고 벼슬아치의 명부에서 그 이름을 지우던 일.    우리말샘

주7

혼인에 의하여 맺어진 친척.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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