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여강(汝强), 호는 여우(如愚)이다. 할아버지는 정호학(鄭好學)이고, 아버지는 정도창(鄭道昌)이며, 어머니는 이도(李蒤)의 딸이다.
1649년(인조 27)에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예조좌랑(禮曹佐郎) ‧ 병조좌랑(兵曹佐郎)을 역임하고, 서천군수(舒川郡守) ‧ 영광군수(靈光郡守) ‧ 고부군수(古阜郡守) 등 외직에 있다가 정언 · 장령 등 언관직을 지냈다. 1674년(현종 15)에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승하하자, 내상(內喪)에는 고부사(告赴使)를 보내지 않는 전례에 따라 고부사를 보내지 말자고 거듭 주장하다가 관직이 교체되었으며, 여사군(轝士軍) 선발에 뇌물을 받은 전업실(田業實)을 처형하는 안건과 관련하여 절차를 강조하다가 사직을 청하였다.
1680년(숙종 6)에 장령으로 있으면서, 『 현종실록』의 개수, 현종 묘정에 배향되어 있는 조경(趙絅)의 출향(黜享), 신범화(申範華)의 원찬(遠竄), 율법에 따른 강만철(姜萬鐵)의 처단, 오시수(吳始壽)의 사형 면제, 이빈(李穦)의 삭직(削職), 보사공신(保社功臣)의 추록 반대, 허적(許積)의 인척인 한순석(韓舜錫)의 처벌 등 서인의 언론을 담당하였다.
이듬해에는 명나라의 제도를 따라 계성묘(啟聖廟)를 세워 숙량흘(叔梁紇) 등을 제사 지내고, 양명학을 배척하는 데 공로가 있는 설선(薛瑄)을 문묘에 종사하도록 상소를 올렸으며, 기근에 과다한 논상 정지, 궁가 절수지(折受地)의 폐단, 태조 존호(太祖尊號)의 추상에 반대하였다. 1684년(숙종 10)에 승지로 승진하였으나, 일본(日本)에서 온 서계(書契)의 정보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누출시킨 죄로 파직되었다가 얼마 후 복직되었다.
해주 정씨 가문의 족보 『갑술보(甲戌譜)』를 편집하였으며, 사후인 1694년(숙종 20)에 아들 정계주(鄭啓周)가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