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평산(平山)이고, 자는 덕보(德輔), 호는 여상당(如傷堂)이다. 고려의 개국공신 1등에 책록된 신숭겸(申崇謙)을 시조로 하며, 증조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인 신읍(申浥), 부친은 사재감첨정(司宰監僉正)의 신명희(申命羲), 모친은 진사 강문두(姜文斗)의 딸인 금천(衿川) 강씨(姜氏)이다.
어려서 의지와 기개가 범상치 않았는데, 성장하여 과장(科場)에 출입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부친상을 마친 뒤 투필(投筆)하고 무예에 종사하였다. 1698년(숙종 24)에 선전관(宣傳官)에 제수되었으나, 훈련대장(訓鍊大將) 신여철(申汝哲)을 나문(拿問)하는 과정에서 신전(信箭)을 소홀히 한 죄로 천안군(天安郡)의 금말역(金蹄驛)에 3년 동안 정배(定配)되었다.
1699년(숙종 25)에 풀려나 이듬해에 무과(武科)에 장원을 차지하여 비변사(備邊司) 낭청(郞廳)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도총부도사(都摠府都事) · 훈련원(訓鍊院) 첨정(僉正) · 도총부 경력(經歷) 등을 역임하였고, 내시사(內試射)에서 우등(優等)을 차지하여 표피(豹皮)를 하사받기도 하였다.
1705년(숙종 31)에 가산군수(嘉山郡守)로 차출되어 지방관으로서 관아(官衙)에 백성을 다친 사람 돌보듯이 감싸며 사랑한다는 의미인 '여상(如傷)'을 편액하고 이를 실천하고자 노력하였다. 아헌(衙軒)을 개조하여 화약(火藥) 등 군기(軍器)를 새로 마련하였고, 사행(使行)에 소용되는 인부(人夫) 및 말을 고용하였는데, 이러한 비용을 민간이 아닌 관아에서 마련하였으며, 큰 흉년이 들자 곡물을 모아 진휼하는 데 힘썼다.
신헌주의 활약이 조정에 알려져 특별히 옷감을 하사받았고, 이후 1710년에 흥해군수(興海郡守), 1716년에 구성부사(龜城府使)로 제수되었을 때에도 공무를 잘 처리하여 포상을 받았다. 1720년(숙종 46)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제수되었으며, 얼마 후 함종부사(咸從府使)로 부임하였다. 이듬해인 1721년에 54세의 나이로 함종에서 신병(身病)으로 사망하자, 회헌(悔軒) 조관빈(趙觀彬), 총융사(摠戎使) 윤각(尹愨), 일휴(逸休) 박필정(朴弼正) 등이 뇌문(誄文)을 지어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