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6년(숙종 22) 형 이병연과 양주(楊州)의 석실서원(石室書院)에 찾아가서 김창협(金昌協)을 배알(拜謁)하고 강학하기 시작하였으며, 스승의 명으로 시를 지어 김창흡(金昌翕)에게 크게 칭찬을 받았다. 1702년(숙종 28) 진사시에 입격하여 성균관에서 유학하였다.
1709년(숙종 35) 영소전 참봉(永昭殿 參奉), 장악원 직장(掌樂院 直長), 내자시 주부(內資寺 主簿), 종부시 주부(宗簿寺 主簿), 공조정랑(工曹正郎), 진산군수(珍山郡守) 등을 역임하였다. 1725년(영조 1) 선원록 교정청(璿源錄 校正廳)에서 종부시 주부로서 『 선원록(璿源錄)』을 수정하는 작업에 참여해 아마(兒馬) 1필을 하사받았고,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고산현감(高山縣監)‧간성군수(杆城郡守) 등에 제수되었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이내 개차(改差)되었다.
시문과 글씨에 능해 형인 이병연과 함께 큰 명성을 얻었으며, 1712년(숙종 38) 아버지와 형, 겸재(謙齋) 정선(鄭敾)‧ 장응두(張應斗) 등과 함께 금강산을 유람하며 다양한 시를 남겼다. 생전에 자신의 시를 어느 정도 정리해 둔 것으로 추정되며, 사후 이병연이 동생의 시문을 수집하여 간행을 도모하였다.
저서로는 『 순암집(順菴集)』이 있는데, 1741년(영조 17)에 아들 이도중(李度重)이 운각인서체자(芸閣印書體字)로 인행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