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는 공조좌랑(工曹佐郎) 안광욱(安光郁), 아버지는 좌승지(左承旨) 안후(安垕)이며, 어머니 최씨는 최항(崔恒)의 후손이다.
택당(澤堂) 이식(李植)의 외증손인 가문적 배경을 바탕으로,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에게 수학하였으며, 김창흡(金昌翕), 이병연(李秉淵), 민익수(閔翼洙) 등의 노론계 문인들과 홍세태(洪世泰), 정내교(鄭來僑) 등의 여항시인(閭巷詩人) 및 조영석(趙榮祏), 정선(鄭敾) 등의 이름난 화가와 교유하였다.
경세(經世)의 학문을 지향하면서도 문학에도 뜻을 두어 일찍이 김창흡으로부터 문장을 인정받았으며, 김석주(金錫胄), 오도일(吳道一) 등의 당대 대가들에게도 시문을 높게 평가받았다.
당쟁이 극심한 시대에 서인(西人)의 핵심과 연결되면서 동시에 동인(東人)에서 유래한 일부의 가계 내력으로 인하여 환로(宦路)에 지장을 초래하였는지, 26세에 진사시(進士試)에 수석으로 입격하였지만, 결국 문과 응시를 포기하고 은거를 결심하였다. 이후 유일(遺逸)로 천거받아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가 되었고, 공조좌랑(工曹佐郎)을 거쳐, 홍천(洪川)과 제천(堤川)의 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성리학에 몰두하여 많은 저술을 남겼고, 유학을 비롯하여 문학 · 경세학(經世學) 등에도 조예가 깊었다. 문장은 한유(韓愈)와 소식(蘇軾)을 모범으로 하면서, 유가의 학술 이념을 충실히 따라 도(道)의 순수성 보존과 도(道)의 천명을 강조하였다. 또한, 사실적이고 현실성을 강조한 명실론(名實論)을 주장하고, 과도한 수식이나 난삽하고 허황된 문장의 창작을 반대하였다.
시는 두보(杜甫)의 시법을 따라 호방하면서도 침울한 미학을 지녔으며, 육유(陸游)와 진여의(陳與義)의 시를 따라 평담한 느낌을 주기도 하였다. 아울러 유학의 도통(道統)이 송나라 말기 이후 조선에 전해졌으며, 중국과 조선 문장가의 차이는 지정학적 차이에 불과하다는 서술을 통해 비교적 주체적인 논리를 전개하였다.
저서로는 6대손 안종학(安鍾學)이 편집한 『회와집(悔窩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