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원기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 정언, 부사직, 황해도 관찰사, 승지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면경(勉卿)
구봉(九峯)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30년(인조 8)
사망 연도
1680년(숙종 6)
본관
임천(林川)
주요 저서
구봉집(九峯集)
주요 관직
정언|지평|서장관|부사직|황해도관찰사|승지
관련 사건
병자호란|경신대기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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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조원기는 조선 후기에 정언, 부사직, 황해도관찰사, 승지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현종 대 공의(公義) · 사의(私義) 논쟁에서 서필원(徐必遠)을 옹호하였으며, 동지사 서장관(書狀官)으로 파견되어 조선과 청나라의 관계 안정에 힘썼다. 이후 응지소(應旨疏)를 통해 국왕에게 간언하였으며, 경신 대기근 속에서 백성을 구휼하고 사치를 금지하도록 요청하는 등 언관으로서 활동하였다.

정의
조선 후기, 정언, 부사직, 황해도 관찰사, 승지 등을 역임한 문신.
가계 및 인적 사항

본관은 임천(林川), 자는 면경(勉卿), 호는 구봉(九峯)이다. 조인(趙璘)의 증손자로, 할아버지는 청송부사 조희진(趙希進)이고, 아버지는 군수 조시형(趙恃馨)이며, 어머니는 참판 심정양(沈廷揚)의 딸이다. 영의정 이경석(李景奭)의 사위이자 문인이며, 신정(申晸), 신최(申最), 이행일(李行逸) 등과 교유하였다.

주요 활동

어려서부터 학문에 뛰어나 약관의 나이로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으며, 1660년(현종 1)에 증광시(增廣試)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들어갔다. 1664년(현종 5)에 김만균(金萬均)이 할머니의 원수인 청나라의 사신을 접대할 수 없다는 주장을 둘러싸고 이를 비판하는 서필원(徐必遠)과 옹호하는 송시열(宋時烈)을 중심으로 서인 내부에서 공의(公義) · 사의(私義) 논쟁이 발생하였다. 이때 당시 정언(正言)으로 있으면서 서필원에게 동조하였다가 박세당(朴世堂) · 오시수(吳始壽) 등과 함께 오사(五邪)로 낙인찍히고 체직되었으나 곧 지평(持平)으로 제수되었다.

1666년(현종 7), 병자호란 당시 납치되었던 안추원(安秋元)이 도망쳐 나온 일로 청나라 사신에게 현종이 모욕을 당하였는데, 얼마 후 정지화(鄭知和), 민점(閔點)과 함께 동지사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되어 일행을 엄하게 단속하여 후환이 없게 하라는 왕명(王命)을 받고 파견되었다. 무사히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와서는 부사직(副司直)으로서, 백성을 아끼고 간언을 받아들이며 근검 절약을 요청하는 등 6개 조항에 대한 응지소(應旨疏)를 올려 마장(馬裝)을 하사받았다.

경신 대기근 속에서 1672년(현종 13)에 이선(李選)과 함께 충청도 수재순시어사(水災巡視御使)가 되어 백성을 구휼(救恤)하는 데 힘썼으며, 대궐의 전각 수리를 반대하고, 문무과 합격자 발표에 신은(新恩) · 창악(倡樂) · 경연(慶宴) 등 사치스러운 행사를 금지하도록 요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숙종 대에 들어서 황해도관찰사와 춘천부사, 그리고 승지를 역임하였다.

학문과 저술

학자로서도 문명이 높았으며, 저서로는 『 구봉집(九峯集)』이 있다.

참고문헌

원전

『구봉집(九峯集)』
『숙종실록(肅宗實錄)』
『현종실록(顯宗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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