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식(李湜)의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정원(正源)이다. 사성(司成) 이창정(李昌庭)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심(李襑)이다. 아버지는 이정징(李鼎徵)이며, 어머니 해평윤씨는 윤창언(尹昌言)의 딸이다.
1675년(숙종 1) 증광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언(正言) · 수찬(修撰) · 지평(持平)을 역임하고, 1678년(숙종 4)에 부교리가 되었다. 이때 노비를 혹독하게 형벌한 사인(士人) 이익대(李益大)의 아내 아정(阿貞)의 사형을 반대하며 지나친 형벌의 남용을 비판하였으며, 남인(南人)의 입장에서 송시열(宋時烈)을 찬양하던 윤헌경(尹憲卿)의 치죄(治罪)하기를 요청하였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 이후 다시 조정에 부수찬(副修撰)‧ 교리(校理)‧ 응교(應敎) 등으로 기용되어 대사헌 목창명(睦昌明) 등과 함께 송시열의 처벌을 주장하였으며, 왕의 잘못을 연명으로 차자(箚子)를 올렸다가 삭탈관작(削奪官爵) 및 문외출송(問外黜送)을 당하였으나 이내 환수되었다.
1691년(숙종 17)에는 대사간으로서 원자(元子)의 호(號)를 정할 때에 반교문(頒敎文)을 소홀하게 지은 남용익(南龍翼)을 논핵하였다. 경신환국(庚申換局) 당시 옥사(獄事) 과정에서 죽은 윤휴(尹鑴)를 이장(移葬)하려 하자 휼전(恤典)을 청하여 장수(葬需)와 역군(役軍)의 하사를 허락받았다.
이외에도 숙종이 사하리(沙河里)에서 친림(親臨)하여 열무(閱武)할 때 본병(本兵)과 대장들을 추고(推考)하도록 하여 군정(軍情)의 엄숙함과 기율(紀律)을 엄중함을 추구하였다. 지방민과 갈등을 겪는 현령(縣令) 윤이형(尹以亨)을 끝까지 징계하도록 하여 탐관오리(貪官汚吏)들을 경계하고자 하였다.
그는 주로 조정에서 대간으로서 활약하였으나, 황해도관찰사나 강원도관찰사 등 지방직도 역임하였고,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甲戌換局) 이후 남인임에도 불구하고 탕평 정국을 표방하는 숙종의 정책 기조 아래 계속 기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