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흥 ()

근대사
인물
대한제국기 법무협판, 선무사, 중추원찬의 등을 역임한 관료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52년(철종 3) 6월 5일
사망 연도
1924년 6월 7일
본관
동래(東萊)
출생지
서울
주요 경력
법부협판|중추원찬의
내용 요약

정인흥은 대한제국기 의병 재판에 참가한 구한말의 관료, 법조인으로 조선총독부 중추원찬의를 지냈다.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반발한 의병이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자 중부 지방의 의병을 해산시키기 위한 선무사로 파견되었다. 1908년 판사로 임명되어 의병 재판에 참가하였다. 일제강점기 초기의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정의
대한제국기 법무협판, 선무사, 중추원찬의 등을 역임한 관료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
가계 및 인적 사항

정인흥(鄭寅興)은 1852년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조선총독부 판사를 지낸 정준모의 아버지이자 이조판서를 지낸 정순조의 아들이다.

주요 활동

1878년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1894년 정부 직제 개편 이후 사법 부문 관료로 주로 근무하였다. 주1의 참의를 거쳐 법부 민사국장, 법률기초위원장 등에 임명되었다. 1896년에는 주2이 되었으며, 을미사변(乙未事變)단발령에 반발하는 의병이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자 중부 지방의 의병을 해산시키기 위한 주3로 파견되었다. 1908년 판사로 임명되어 의병 재판에 참가하였다.

한일병합조약 체결 직후 1910년부터 직제 개편이 이루어진 1921년까지 11년 동안 중추원찬의(中樞院贊議)를 지냈다. 친일 성향의 사회단체인 대동학회(大東學會)와 공자교회(孔子敎會), 공자교에서도 활동하였다.

평가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과 광복회가 공동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 친일인명사전』(E0079420)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명단에 선정되었다. 2006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공식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006인 명단에도 포함되어 있다.

참고문헌

원전

『고종실록(高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순종실록(純宗實錄)』
『청선고(淸選考)』

단행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Ⅳ-16(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2009)
주석
주1

구한말에 설치한 관청. 조선 고종 31년(1894)에 형조를 없애고 대신 설치하였다. 사법 행정, 경찰, 사면(赦免) 따위의 사무와 고등 재판소 이하의 재판소를 감독하였으며, 이듬해에 법부(法部)로 고쳤다.    우리말샘

주2

구한말에 둔, 법부(法部)의 버금 벼슬.    우리말샘

주3

조선 시대에, 큰 재해나 난리가 일어났을 때 왕명을 받들어 재난을 당한 지방의 민심을 어루만져 안정시키는 일을 맡아보던 임시 벼슬. 또는 그 벼슬아치.    우리말샘

집필자
김헌주(연세대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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