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중고기부터 군사 행정이나 군단 지휘를 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다.
관등은 대나마(10관등)에서 사지(13관등)까지의 인물 중에서 임용되었다. 관등을 기준으로 할 때 5두품 계층의 인물이 주된 대상이었으며, 소속 부대의 중간급 지휘관으로 활동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사료에 기병과 보병 중 어느 부대를 통솔하였는지 기록되어 있지 않아 단정하기는 어렵다. 선덕왕 대에 패강 지역의 지배를 위하여 설치된 관청인 패강진전에서 두상제감과 제감이 나란히 보이고 있어 군단 지휘관뿐만 아니라 군사 행정 담당자로서도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제감의 전체 인원은 육정에 26명, 구서당에 36명, 계금당에 1명을 두었고, 589년(진평왕 11년)에 병부에 제감 2명을 두었다고 하였으며. 패강진전에도 두상제감 1명, 제감 1명을 두었다고 하여 전체 67명에 이른다. 다만 병부는 중앙 행정 관부이고, 패강진전은 외관(外官)으로 기록되어 있어 군사 행정과 관련한 인원으로 분류되어 지휘관으로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부대 지휘관으로서 제감은 육정, 구서당, 계금당에 소속된 63명만 해당된다. 또한 신라 중고기부터 있었던 육정과 달리 구서당이나 계금당에 설치되었던 점을 참고할 때 통일신라 시기에는 왕경 주둔 군단의 지휘관으로 한정되었음을 볼 수 있다.
제감이 설치된 육정, 구서당, 계금당 등의 군단이나 병부, 패강진전 등 행정 기관의 성격을 감안할 때, 신라의 핵심 군단이나 관부의 중간급 지휘관이나 군사 행정 담당자로 역할하였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