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욱경은 해방 이후 「나부 이인」, 「작품 E」, 「산」 등을 그린 화가이다. 1950년대 김기창·박래현 부부와 김흥수 화백 등에게서 그림을 배웠다. 1963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추상표현주의를 학습했다. 1973년 개인전에서는 단청의 색채와 민화적 모티프, 한지 재료들을 이용한 실험적 작품을 제작했다. 1980년대에는 한국의 산, 바다, 섬의 자연적 곡선에서 차용한 구불거리는 선과 밝은 색채가 결합한 추상화가 등장한다. 최욱경은 조지아 오키프의 영향을 자기화하여 특유의 여성적 색채 추상의 세계를 구현한 작가로 평가 받는다.
1960~70년대 미국에 유학하여 추상표현주의를 학습했으며,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의 작품과 한국의 자연에서 영감을 받아 날렵한 곡선과 아름답고 강렬한 색채를 사용하는 독자적 색채 추상화를 구축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최욱경의 생애는 유년 시절부터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시절까지를 성장기로, 1963년 미국으로 건너가 1971년 일시 귀국까지를 1차 유학 시기, 1974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간 후 1981년 영구 귀국까지를 2차 유학 시기, 이후 국내에서 자리를 잡고 1985년 45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기까지의 국내 정착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최욱경은 출판업을 하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능과 의욕을 보였으며 1950년대에는 김기창과 박래현의 부부화실에서 그림을 배웠다. 이화여자중학교 미술반에서 김흥수와 장운상에게, 서울예술고등학교에서 문학진, 정창섭, 김창렬 등에게 배웠으며 1959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에 입학하였다.
미술대학 3학년 때에는 한국미술협회전에서 「정물」로 국무총리상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는 반추상과에 「나부 이인(裸婦 二人)」으로 입선을 했다. 1962년에는 5.16 1주년기념 신인예술상에서 「작품 E」로 장려상을 받았고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입선하는 등 일찍 두각을 나타냈다.
대학원 재학 중 1963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크랜부룩미술아카데미(Cranbrook Academy of Art)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부전공으로 조각과 도자기를 배웠으며, 뉴욕의 브루클린미술관(Brooklyn Museum) 미술학교, 메인(Maine) 주(州)의 스코히건미술학교(Skowhegan School of Art) 등 여러 미술학교에서 학습했다. 1968년부터는 뉴햄프셔(New Hampshire)의 프랭클린피어스대학교(Franklin Pierce University)에 교수로 재직하다가 1971년에 귀국했다.
1971년에는 신세계 화랑에서 귀국 개인전을 열었고, 1972년에는 파리 비엔날레 출품작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시집 『낯설은 얼굴들처럼』을 출간했고, 한국 아메리카 학회가 주최한 한미문화교류세미나에 미술부문 강사로 참석하기도 했다. 1973년에는 미도파 화랑에서 ‘재료의 실험전’을 열었다.
1974년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1976년에 로스웰미술관(Roswell Museum and Art Center)의 연구비 수상자로 선정되어 뉴멕시코(New Mexico)에서 일 년간 지원을 받으며 안정적인 작품활동을 했다. 이때 제작된 작품들은 1977년 로스웰미술관과 1978년 서울의 미국문화원에서 전시되었고 이어 부산과 대구에서도 순회전을 개최했다.
1977년부터 위스콘신주립대학교(Wisconsin State University)의 교수로 있다가 1979년 귀국하여 영남대학교 교수, 1981년부터는 덕성여자대학교 교수로 재직했으며 1985년에 사망했다.
최욱경의 작품세계는 단색화와 민중미술로 이어지는 1970~80년대 국내 화단의 흐름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그는 국내에 추상표현주의의 영향이 사실상 사그라든 시점에 미국 본토에서 이를 본격적으로 학습했다는 점과 남성 중심의 추상화단에서 술과 담배를 즐기는 낭만적인 성격의 독신 여성이라는 이색적인 존재로서 주목받았다.
학습기를 지나 점차 자신만의 독자적 양식을 구축하던 때에 조지아 오키프의 영향을 받고 이를 자기화하였으며, 한국의 자연에서 추출한 형태와 강렬하고 아름다운 색채를 구사하는 고유의 능력으로 독자적인 색채 추상화의 양식을 완성한 것으로 평가된다.
미국 유학 시기에 윌렘 드 쿠닝(Willem de Kooning), 마크 로스코(Mark Rothko), 로버트 마더웰(Robert Motherwell) 등 추상표현주의 대가들의 작품을 연구했다. 특히 크랜부룩에서는 윌렘 드 쿠닝의 인체 드로잉을 집중적으로 학습하여 많은 누드 드로잉 작품을 제작했다. 마크 로스코의 색채의 아름다움과 숭고의 미학에 대해서도 존경의 글을 남겼으며, 로버트 마더웰의 작품에 보이는 표현적이고 서예적인 격렬한 터치를 따라하기도 했다.
추상 작업으로 일관하던 1960년대 말에는 로버트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의 컴바인 페인팅(combine painting: 이차원 또는 삼차원의 물질을 회화에 도입)의 영향을 받아 콜라주 작업을 보여주기도 했으며 반전(反戰) 메세지를 담은 작품을 시도하기도 했다.
귀국 후 1973년 개인전에서는 단청의 색채와 민화적 모티프, 한지 재료들을 이용한 실험적 작품을 제작하면서 한국적 요소들을 탐구하기도 했다.
2차 유학기의 뉴멕시코에서는 사막, 소뼈 등의 자연 형태들이 탐구되었으며 특히 뉴멕시코에 거주했던 여성 작가 조지아 오키프의 영향을 받았다. 이 시기에는 형상이 복원되면서 강렬하고 파괴적인 추상적 터치가 줄어들고 화면 내에 공간감을 남기며 형태를 구성하는 등 보다 차분한 화면으로 변모하게 된다. 최욱경은 이때에 내면의 여성성을 처음으로 탐구하기 시작했다고 이야기한 바 있으며, 그 결과 작품에는 곡선이 강조되고 색채도 부드러운 파스텔톤을 보여준다.
귀국 후 1980년대의 작품은 독자적 양식기로 평가된다. 한국의 산, 바다, 섬의 자연적 곡선에서 차용한 구불거리는 선과 밝은 색채가 결합하여, 기쁨과 환희를 전달하는 춤을 추는 듯한 형태의 추상화가 등장한다. 색들의 대비와 충돌이 강렬한 감정을 표현하고 날렵하고 부드러운 형태들이 속도와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화면은, 추상표현주의와 조지아 오키프의 영향을 자기화하여 만들어낸 특유의 여성적 색채 추상의 세계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