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릉 ()

조선시대사
유적
문화재
서울특별시 노원구에 있는 조선 제11대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의 단릉.
이칭
이칭
태강릉(泰康陵), 서울 태릉과 강릉
유적/고인돌·고분·능묘
양식
단릉
건립 시기
조선 전기
관련 국가
조선
관련 인물
문정왕후
소재지
서울특별시 노원구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사적(1970년 05월 26일 지정)
소재지
서울 노원구 화랑로 681 (공릉동)
내용 요약

태릉(泰陵)은 서울특별시 노원구에 있는 조선 제11대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의 단릉이다. 태릉은 왕후의 단릉이지만, 능역이 넓고 석상의 규모도 매우 크며 병풍석을 갖추었다. 중종의 곁에 묻히고 싶었던 바람을 이루지 못하고 홀로 도성의 동쪽에 자리를 잡았으나, 동쪽에 문정왕후의 아들 명종과 인순왕후 심씨의 강릉이 뒤이어 자리 잡았다. 이를 합하여 태강릉이라 부르며 사적으로 지정하였다.

정의
서울특별시 노원구에 있는 조선 제11대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의 단릉.
건립경위

문정왕후(文定王后, 1501~1565)는 1517년 중종(中宗, 1488~1544, 재위 1506~1544)의 계비로 왕비에 책봉되었으며, 1545년에 명종(明宗, 1534~1567, 재위 1545~1567)이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8년간 주1하였다.

1565년 4월 6일 문정왕후가 창덕궁 소덕당에서 승하하자, 명종은 문정왕후의 상례를 대왕의 예로 갖추도록 명하였다. 문정왕후는 중종 곁에 묻히려는 의지를 강력히 나타내었다. 중종의 정릉(靖陵)은 본래 장경왕후(章敬王后, 1491~1515)와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으로 고양군에 있었으나, 1562년에 문정왕후의 주장으로 광주 선릉(宣陵) 곁으로 천릉하였다.

새로 조성된 정릉은 지대가 낮아 장마철마다 강이 범람하여 침수되는 곳이었다. 그럼에도 문정왕후의 뜻에 따라 능호를 신정릉(新靖陵)이라 정하고 중종 곁에 능침을 마련하려 시도하였다. 그러나 막상 구덩이를 파 보니 넓고 깊게 돌이 박혀 뽑아낼 수도 없었기 때문에 다른 곳을 물색할 수밖에 없었다.

명종은 도성의 동쪽으로 10리쯤 거리에 있는 대방동(大方洞)이 거리도 가깝고 후손이 번성할 곳이라 하여 택하였다. 결국 문정왕후는 중종의 곁에 묻히지 못하고 도성의 동쪽 노원면 대방동에 단릉으로 자리 잡고 능호를 태릉이라 하였다.

변천

1567년에 태릉의 동쪽 언덕에 문정왕후의 아들인 명종의 능을 조성하고 강릉(康陵)이라 하였으며, 1575년에 명종비 인순왕후의 능침이 쌍릉으로 조성되었다. 이로써 태릉과 강릉이 하나의 능역을 갖추었다.

태릉의 주2은 본래 정전(正殿) 3칸에 좌 · 우 익각을 갖추어 5칸이며, 배위청(配位廳)은 3칸으로 8칸 정자각으로 건립되었다. 그러나 1694년(숙종 20)에 퇴락한 정자각을 중건하면서 정전의 좌 · 우 익각을 철거하여 정전 3칸에 배위청 3칸으로 건립하였다.

한국전쟁으로 다시 정자각이 없어져 1994년에 정전 3칸, 배위청 2칸의 5칸 정자각이 되었다. 1966년에 태릉과 강릉 사이에 태릉선수촌이 건립되어 넓은 면적의 산릉이 훼손되었으나, 2009년에 조선왕릉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제되면서 태강릉의 복원이 대두되었고 선수촌을 이전하고 산릉을 되살리려고 노력하고 있다.

형태와 특징

태릉은 양주 노원면 대방동에 주3으로 조성되었다. 당시 왕후릉에는 주4을 설치하지 않았으나, 태릉에는 병풍석을 두르고 난간석(欄干石)을 설치하였다.

1788년에 기록된 『 춘관통고(春官通考)』에는 능상 아래 100보 지점에 정자각이 있고, 그 오른쪽에 수라청이 있으며, 맞은편에 수직방이 있다고 하였고, 정자각에서 남쪽으로 74보 지점에 주5이 있으며, 그 서쪽으로 158보 위치에 안향청(安香廳)과 주6 · 주7 등이 있고, 홍살문의 남쪽으로 200보 지점에 연못이 있었다고 기록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태릉에는 정자각과 수직방, 홍살문은 남아 있으나, 수라청과 재실 일곽, 연못 등은 남아 있지 않다.

의의 및 평가

왕후의 단릉으로 조성하였으나, 대왕릉의 격식을 갖추어 병풍석을 설치하고 능상 위에 놓여진 돌거리들의 크기가 크고 육중하다. 『춘관통고』에 병풍석의 높이는 7자 2치로 기록되었는데, 『 세종실록(世宗實錄)』에 헌릉(獻陵)의 병풍석이 5자 7치인 것에 비교하면 높게 조성된 것이다. 주8주9주10의 크기도 큰 편이다.

참고문헌

원전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춘관통고(春官通考)』

단행본

『조선왕릉 종합학술보고서 Ⅲ』(국립문화재연구소, 2012)

인터넷 자료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https://www.heritage.go.kr/)
위키실록사전(http://dh.aks.ac.kr/sillokwiki)
주석
주1

임금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을 때, 왕대비나 대왕대비가 이를 도와 정사를 돌보던 일. 왕대비가 신하를 접견할 때 그 앞에 발을 늘인 데서 유래한다.    우리말샘

주2

왕릉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봉분 앞에 ‘丁’ 자 모양으로 지은 집.    우리말샘

주3

묏자리나 집터 따위가 임방(壬方)을 등지고 병방(丙方)을 향한 방향. 서북 방향을 등지고 동남 방향을 바라보는 방향이다.    우리말샘

주4

능(陵)을 보호하기 위하여 능의 위쪽 둘레에 병풍처럼 둘러 세운 긴 네모꼴의 넓적한 돌. 겉에 12신(神)이나 꽃무늬 따위를 새긴다.    우리말샘

주5

능(陵), 원(園), 묘(廟), 대궐, 관아(官衙) 따위의 정면에 세우는 붉은 칠을 한 문(門). 둥근기둥 두 개를 세우고 지붕 없이 붉은 살을 세워서 죽 박는다.    우리말샘

주6

무덤이나 사당 옆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지은 집.    우리말샘

주7

나라의 제사를 맡아보던 관아.    우리말샘

주8

넋이 나와 놀도록 한 돌이라는 뜻으로, 상석(床石)과 무덤 사이에 놓는 직사각형의 돌을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9

능(陵) 앞에 세우는 문관(文官)의 형상으로 깎아 만든 돌. 도포를 입고 머리에는 복두(幞頭)나 금관을 쓰며 손에는 홀(笏)을 든 공복(公服) 차림을 하고 있다.    우리말샘

주10

능(陵) 앞에 세우는 무관(武官) 형상으로 만든 돌. 능 앞 셋째 줄의 왼쪽과 오른쪽에 각각 하나씩 세운다.    우리말샘

관련 미디어 (2)
집필자
신지혜(건축문헌고고스튜디오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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