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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문헌
조선 전기의 문신, 홍귀달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611년에 간행한 시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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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전기의 문신, 홍귀달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611년에 간행한 시문집.
내용

원집 3권, 속집 6권, 합 9권 6책. 목판본.

원집은 1611년(광해군 3) 외현손 최정호(崔挺豪)가 가장초고(家藏草稿)를 편집, 간행하였고, 속집은 1843년(헌종 9) 후손 종구(宗九)·종표(宗標)·기찬(箕瓚) 등이 원집에 빠진 시문을 수집, 간행하였다. 원집 권두에 정경세(鄭經世)의 서문이, 권말에 최정호의 발문이 있고, 속집 권말에 유치명(柳致明)의 속집후서(續集後序)와 홍은표(洪殷標)의 발문이 있다.

원집 권1에 시 419수와, 권2에 기(記) 30편, 서(序) 34편, 소(疏) 6편이 있고, 권3에 비지(碑誌) 31편, 제문 19편, 잡저 34편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속집 권1∼4에 시 636수이 있고, 권5에 서(序) 8편, 기 5편, 묘비명 6편, 연보이 있으며, 권6에 행장, 임호서원봉안문(臨湖書院奉安文), 상향축문(常享祝文) 2편, 양산서원봉안문(陽山書院奉安文)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 가운데 <청석동노인탄 靑石洞老人歎>은 청석동을 지나다가 예순 살 된 초라한 행색의 노인과 만나 나눈 대화를 적은 것으로, 오랑캐에게 1남 2녀가 모두 끌려가고 늙은 부부만 남아 풀뿌리로 연명해가는 비참한 정경을 묘사하였다.

<야문비곡 夜聞婢哭>은 노년에 아내를 잃은 뒤 홀로 지내면서 계집종의 비통에 젖은 오열을 들으며 소리내어 울지도 못하는 자신의 슬픔을 솔직하게 노래한 작품이다.

<어양회고삼절 漁陽懷古三絶>이나 <도제도서사오절 到帝都書事五絶> 등 여러 작품은 1481년(성종 12) 춘추절 하례사로 중국에 갔을 때 그 곳의 낯선 풍물과 마주해 느낀 감회를 노래한 것들이다.

<자술 自述>에서는 세상사를 잊고 물고기와 새를 벗삼아 자연에 묻히고 싶은 심정과 함께, 병중에도 시를 놓지 못해 오히려 병이 도지고, 가난 속에서도 가난을 즐기므로 늘 가난하기만 한 살림을 노래하기도 하였다.

<감우 感遇>에서는 절역(絶域)에서 지난 평생을 되돌아보며 가의(賈誼)와 소무(蘇武)에 자신을 가탁하며 씁쓸한 감개를 되씹고 있다.

시의 문체별로 볼 때 육언장시인 <육언장구중송사고지행 六言長句重送士高之行>과 첫구 두 글자를 같은 글자로 얹는 제언체(齊言體)인 <수위사절 誰謂四絶>, 그 밖에 <회두체 回頭體> 등 잡체시의 창작도 이따금 눈에 띈다.

순탄한 벼슬길을 걸었던 초년의 시와, 왕의 노여움을 사서 좌천되고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죽기까지 만년의 시는 분위기에 있어 어조의 차이가 느껴진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사람의 눈을 놀라게 하는 감정의 분출이나 격정적인 표현은 찾아보기 어렵고, 차분히 가라앉은 절제된 시정이 돋보인다.

그러나 개성이 없는 그의 시문을 두고, 이수광(李睟光)은 ≪지봉유설≫에서 일컬을만한 것이 없다고 품평하였다. 이는 당시 그가 문한(文翰)의 직책을 맡게 되자 사람들이 그를 가볍게 보았음을 나타내는 대목이다.

<취수옹양화기 醉睡翁養花記>는 이겸(李謙)의 양화취미를 두고 완물상지(玩物喪志 : 사물을 접해 그것과 함께 즐기기는 하지만 뜻을 찾아내지 못함.)로 우려하는 혹자의 말에 대해 반론의 형식을 빌려 옹호한 내용이다.

<빙옥난고서 氷玉亂藁序>에서는 시란 성정(性情)에 바탕을 두고 글귀의 뜻을 귀히 여길 뿐인데, 말을 과장하거나 아름답게 꾸며 남의 이목을 즐겁게 하는 데만 힘을 쏟음은 말류의 폐단이라는 거였다. 이는 조탁보다는 성정의 바름을 중시한 시관(詩觀)이 잘 드러난 것이다.

소는 모두 당시의 시대적인 폐단을 들어 직간한 내용으로, 간신(諫臣 : 임금에게 옳은 말로 간하는 신하)의 풍모가 잘 나타나 있다.

<거간 拒諫>과 <청종간소 請從諫疏> 등은 언로(言路)를 막아 신하의 충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반드시 망하므로, 언로가 단 하루라도 막혀서는 안 됨을 역설한 내용이다. <간타위소 諫打圍疏>는 함경·평안 양도에 오랑캐의 노략질이 극심함을 말한 뒤, 변방 방비의 허실을 낱낱이 지적해 이의 시정을 요구한 것이다.

<의정부진폐소 議政府陳弊疏>와 <구유생소 救儒生疏> 등은 모두 당시 첨예한 현실문제에 대한 직간의 내용을 담았고, <정부소 政府疏>는 모두 10조에 걸쳐 당시 폐정의 시정을 건의한 내용이다.

그는 글로써 임금의 바른 치도(治道)의 확립과 언로개방, 변방문제, 고을수령의 자질문제, 군사제도, 흉년문제 등 여러 폐단의 척결을 요구하였다. 그래서 이 글로 임금의 노여움을 사 좌천되기까지 하였다.

이 글은 사림과 훈구세력간의 알력이 사화로까지 이어져 파란이 일던 당시의 전반적 분위기를 이해하는 데 참고자료가 된다. 국립중앙도서관과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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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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