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완주 출생(추정). 호는 무헌(無軒).
유진오는 1922년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완주에서 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가 수학한 중동학교 졸업대장에 시인의 본적이 경성부(京城府) 연건정(蓮建町)으로 표기되어 있는 점을 근거로 출생지가 서울일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유진오는 기계유씨 부정공파(副正公派)의 후손으로 부친 유치구(兪致九)와 모친 남원양씨(南原梁氏) 사이에서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36년 서울 중동(中東)학교에 입학하였다. 이때 급우가 된 시인 김상훈(金尙勳)과 함께 도서반원이 되어 문학 수업에 열중한 것으로 알려졌고, 이 무렵 공산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중동학교 재학 중에 일본 학생들과 싸움을 자주 해서 경찰서에 잡혀가기도 했다고 한다.
1941년 중동학교 졸업 후 일본 와세다 대학 예과, 메이지 대학, 도쿄문화학원 등에서 수학하였다. 이와 같이 그가 학교를 여러 번 바꾼 것은 일본 경찰의 감시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1945년 8월 17일 성북경찰서를 습격하여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키고 무기를 빼앗아 무장하기도 했다고 한다.
1945년 11월 시인 오장환의 천거로 김상훈이 주간을 맡았던 『민중조선(民衆朝鮮)』 창간호에 「피리ㅅ소리」를 발표하며 시인으로 등단하였다. 그해 공산당의 전위 조직인 〈공산청년동맹〉에 가입하였으며, 이 무렵 호를 무헌(無軒)이라고 쓴 바 있다.
1946년 1월 공산당에 입당하였고, 2월 25일 학병 추모행사에서 「눈 감으라 고요히」라는 시를 낭독하고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했다. 그해 7월 1일에는 서울과학관에서 열린 수재구제문예강연회에서 시 「장마」를 낭독했다.
1946년 8월 15일에 8·15 기념시 「횃불」을 『서울신문』에 발표하였고, 8월 29일에는 종로 YMCA에서 열린 국치기념문예강연회에서 시 「3·8 이남」을 낭독했다. 9월 1일 국제청년데이 기념대회장인 서울 훈련원광장(훗날 동대문운동장)에서 시 「누구를 위한 벅차는 우리의 젊음이냐?」를 낭송하고 대규모 청중들로부터 갈채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9월 3일 ‘미군정 포고령 위반죄’로 구속되어 군정재판에서 1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는 해방이후 시인이 필화사건으로 구속된 첫 번째 사건으로 약 9개월간 복역하였다.
1946년 10월 김상훈, 김광현, 이병철, 박산운 등과 함께 5인의 공동시집인 『전위시인집(前衛詩人集)』을 노동사에서 발간했다. 이 공동시집에 실린 유진오의 작품은 「공청원(共靑員)」, 「장마」, 「횃불」, 「3ㆍ8이남(三八以南)」, 「누구를 위한 벅차는 우리의 젊음이냐?」 등 5편이다.
1947년 5월 26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청주형무소로 이감되어 복역하던 중 감형처분을 받고 석방되었다. 석방 직후 『문학(文學)』4호에 옥중기 「싸우는 감옥」을 발표하였다.
1947년 7월〈조선문학가동맹〉의 방침에 따라 문화공작대에 참가, 그 제1대에 소속되어 경남 지방을 순회하며 인민 조직, 선동을 위한 활동 등을 전개하였다.
1948년 1월 15일 정음사(正音社)에서 개인 시집 『창(窓)』을 간행했다. 이 시집의 서문은 시조시인 조운(曺雲)이 썼으며, 작품 21편과 시인 자신의 발문이 수록되어 있다. 조운은 서문에서 “시의 육탄(肉彈)이라는 민주청년 유진오”는 “명예스러운 인민(人民)의 계관시인(桂冠詩人)”이며 “시를 원자탄보다 무서워하는 무리의 화살을 진두(陳頭)에서 받은 첨병(尖兵)”이라고 표현했다. 시인 자신은 발문에서 “어렸을 때엔 전형적인 소시민(小市民)”이었으나 “시방은 다르다 시인이 되기 바쁘지 않다. 먼저 철저한 민주주의자가 되어야겠다. 시는 그 다음에 써도 충분하다. 시인은 누구보다도 먼저 진정한 민중의 소리를 전하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투철한 민주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인민을 위한 전사(戰士)가 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1948년 10월 27일 노량진에 있던 맏형 유진용(兪鎭容)의 집에서 당시 혜화국민학교 선생이던 김금남과 결혼했다고 한다. 유진오와 김금남 사이에서 딸 유향준이 태어났으며, 부인과 딸은 북한에서 산 것으로 알려졌다.
1949년 1월『학풍(學風)』3호에 「조국과 함께」를 발표하였는데, 이것이 그의 마지막 발표작이 되었다.
1949년 2월 말 지리산 중심의 남로당계 유격대에 ‘문화공작대장’으로 입산하라는 지령을 받고, 부산을 거쳐 지리산으로 갔다. 그곳에서 김지회(金智會) 부대를 만났으나 별반 활동은 벌이지 못한 채 하산하던 중 3월 29일 전북 남원군 어느 부락어귀에서 주민 자경조직인 민보단(民保團)에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해 9월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큰형 유진용 등 가족 친지들의 탄원으로 11월 7일 무기형으로 감형되었다.
1950년 3월 전주형무소로 이감되었으나, 6·25 발발과 함께 행방불명되었다. 당시 좌익수들 대부분이 긴급처형된 것으로 미루어 이때 최후를 맞은 것으로 추정된다.
유진오는 김광현, 김상민, 김상훈, 박산운, 이병철, 최석두 등과 함께 〈조선문학가동맹〉의 정치적 · 문학적 활동의 전위 역할을 수행한 ‘해방기의 신진 좌파 시인’으로 분류된다. 그가 군중집회에서 낭독한 시들은 전위적이고 선동적이며 투쟁적이며 이념적 성격이 강하게 드러나는 것은 사실이다. 그의 구속을 가져 온 문제작 「누구를 위한 벅차는 우리의 젊음이냐」와 같은 작품이 여기에 해당된다. 그러나 그의 상당수의 시들은 정치적 이념적 경향만을 보이고 있는 것이 아니며, 서정적이며 시적인 성취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순이(順伊)」와 같은 작품은 ‘애틋한 시적 감수성이 전통적인 서정으로 형상화된 정한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고 언급된다. 유진오는 이념적 혼란기인 해방기에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실천하면서 서정적 내면의식을 추구한 시인으로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