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빠울로 한국학교 (São Paulo )

단체
1983년에 설립된 브라질의 한국학교.
정의
1983년에 설립된 브라질의 한국학교.
개설

「쌍빠울로 한국학교」는 1983년 브라질 한국교민사회가 종교 색채를 배재하고 세운 가장 큰 규모의 주말 한국학교로, 1998년 설립된 『브라질 한국학교 폴리로고스(Colégio Polilogos)』의 전신이다.

1983년은 브라질 한인사회가 이민 20주년을 기념한 해이다. 당시 브라질 한인사회의 특징은 한편으로는 파라과이나 볼리비아 그리고 아르헨티나를 통해 불법이민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미 브라질에 거주하고 있던 한인들이 또 다시 미국이나 캐나다로 재이주하는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나던 시절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1980년대 남미국가들이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명명된 경제적 현실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브라질 이웃국가에 살고 있던 한인들은 남미인들의 인구이동 물결을 따라 우선 브라질로 재이주하고, 또 다시 브라질에서 북미 국가로 재이주했다.

그 때 당시 브라질 한인사회는 상대적으로 경제적 풍요를 누리던 때였기 때문에, 가장 큰 관심은 후세들에 대한 한글교육이었다. 브라질 한양대학교 동문인 정우영(이사장), 김경수, 안정삼, 유대길, 이한회, 정대영, 황수성 등이 발기인으로 조직했다. 한국의 신일 여자 중 고등학교와 자매결연을 맺으면서 이선용(한국측)을 포함한 8명이 1983년 4월 『한백 장학회』(Fundacão Cultural Han Bak)를 설립한 것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들은 이 장학회를 바탕으로 1983년 5월 7일 봉헤찌로(Bom Retiro)구(區)의 코헤이아 두스 산토스 거리 179번지(R. Correia dos Santos 179) 에 위치한 동양선교교회 교회본당에서 「쌍빠울로 한국학교」 개교했다.

개교 당시 학생 수는 40명 남짓으로 교사의 수도 교장 1명, 교감 1명 그리고 교사 3명 총 5명밖에 되지 않았다. 이정원 교장은 지리 및 역사 과목과 교무행정을, 김성관 교감은 사회 과목과 교무를, 안경자 교사는 국어와 한문 과목과 학습교재 개발을, 정재선 교사는 국사 과목과 학생 지도를, 그리고 최영희 교사는 음악 과목과 도서 관리를 담당했다.

설립목적

「쌍빠울로 한국학교」의 학교설립목적은 학교정관에 명시되어 있듯이, 한인 후세들에게 한글, 한국어, 한국문화에 대한 교육과 사회인으로서의 훈련을 목표로 한국인이라는 자긍심과 정체성을 확립시켜 주는 것이었다.

[연원 및 변천]브라질 한인교포사회의 한글교육에 대한 수요가 가장 절실할 때 설립된 「쌍빠울로 한국학교」는 입학을 원하는 학생들을 모두 수용할 수가 없을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다. 따라서 학교는 총 네 번의 교사 이전을 했다. 학교가 처음 개교한 곳은 당시 한인들의 상업 지역이었던 봉헤찌로(Bom Retiro) 구(區)였으나, 학부형들의 편의를 위해서 당시 한인들의 거주 지역이었던 아끌리마썽(Aclimação) 구(區)로 이전했다가 (이 구역 안에서 두 번 이전), 또 다시 1987년 봉헤찌로 구(區)로 이전했다 (이 구역 안에서 역시 두 번 이전). 1989년 동양선교교회의 교육관(R. Mamoré 71, Bom Retiro)이 새롭게 건립되자 네 번째 이전을 하고 그곳에 정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정우영 이사장이 개인적인 사정으로 미국으로 재이주하기 직전인 1990년 제뚤리우 바르가스(Getúlio Vargas)대학교 상대 출신의 1.5세 엘리트인 김철언이 신임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이때 그를 따르던 한인 1.5세 엘리트 약 40명이 한국학교 이사로 영입되었는데, 이 때 학생 수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따라서 김철언 이사장은 동양선교교회의 교육관이 학교입학을 원하는 학생 모두를 수용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그 이듬해인 1991년 시내 중심과 더 가까운 주제 마리아 리스보아 거리 568번지(R. José Maria Lisboa 568)에 위치한 브라질 학교를 빌려서 분교를 운영했다.

그러던 중 1993년 3월 학교 이사 중의 한 사람이었던 상파울루 대학교 공대출신인 권진호가 제4대 교장으로 취임했다. 이때부터 학교의 모든 체제가 브라질식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교사 역시 한국어와 포르투갈어를 유창하게 하는 브라질에서 교육받은 1.5세로 충당되었고, 또한 학년별 교과서도 한국의 국정교과서가 아닌, 브라질 실정에 맞게 새롭게 만들어진 책으로 대체되었다 (이 때 만들어진 교과서는 미국의 로스엔젤레스 한국학교에서 발간하여 사용하던 것들을 편집한 것이다).

참고로 「쌍빠울로 한국학교」 교장을 역임한 사람은 초대 교장 이정원 (1983년 5월 취임), 2대 교장 안정삼 (1985년 9월 취임), 3대 교장 안경자 (1986년 6월 취임), 그리고 4대 교장 권진호 (1993년 3월 취임)이다.

기능과 역할

「쌍빠울로 한국학교」는 한인사회 내에서 종교성을 배제한 최초의 주말 한글학교로, 1990년 이후 규모면에서 가장 큰 주말학교가 되었다 (학생 수 약 800명에 교사 40 여명). 당시는 한인들의 경제활동이 활발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교사로서 자원봉사 차원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은 나름대로 특별한 사명감을 갖은 사람들이었다. 예를 들면, 한국에서 유치원 및 초중고교에서 교사자격증을 갖고 활동하던 선생님들, 개신교 교회(당시 교회의 수 27개) 목사 사모님들과 한국에서 파송된 선교사들, 소수의 한국 유학생들, 그리고 비교적 한국어를 잘 구사하던 1.5세 한인대학생들이었다.

「쌍빠울로 한국학교」의 분위기는 매우 가족적이었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것은 교사로 활동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자녀들에게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가르쳐야 하는 절대 절명의 사명감을 갖고 있던 엄마들이었다는 점과, 그들 역시 브라질 한인사회의 일원으로 대부분이 여성의류 제조업 및 도·소매업종에 종사하며 학부형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쌍빠울로 한국학교」는 1983년과 1985년 각각 교육간담회와 교육세미나를 열었다. 전자는 “2세를 위한 한국어 교육”이란 주제를 니께이 호텔 회의실에서 다루었고 후자는 한인회 무궁화 홀에서 서울대 교수들 - 전경수 (인류학과), 노태돈 (역사과), 류우익(지리과), 그리고 권영민(국문과) - 로부터 각각 “한인 이민사”, “한국어/한글교육”, “한국역사”, “한국의 국토”에 대한 강연을 듣는 것이었다.

「쌍빠울로 한국학교」는 창립한 1983년 7월부터 1990년까지 해마다 학생들의 한국 연수를 실시했다. 어차피 로스앤젤레스를 거쳐 한국으로 나가기 때문에, 때로는 미국 LA의 디즈니랜드를 방문하거나 때로는 본국의 YMCA과 연계하여 하기 연수를 함께하기도 했다. 1990년도까지의 모국연수 상황은 다음과 같다: 1983년 제1회에는 52명의 학생들을 정우영 이사장이, 1984년 제2회에는 30명의 학생들을 이정원 교장이, 1985년 제3회에는 30명의 학생들을 이혜란 교사가, 1986년 제4회에는 30명의 학생들을 김용식 교사가, 1987년 제5회에는 32명의 학생들을 안경자 교장이, 1988년 제6회에는 30명의 학생들을 권봉숙 교감이, 1989년 제7회에는 65명의 학생들을 안경자 교장이, 그리고 1990년 제8회에는 25명의 학생들을 권봉숙 교감이 인솔했다.

그리고 「쌍빠울로 한국학교」는 한국 민속무용복과 전통악기 등을 구비하여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그리고 반드시 일 년에 한 번 학습발표회를 통해 발표하게 했다. 그리고 이러한 훈련을 받은 학생들을 브라질 한인사회의 주요 문화행사에 참여시키도록 하여 한국인들의 단결은 물론 한국문화를 브라질 사회에 알리는 활동에 직간접적으로 기여했다. 그리고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때에는 평상시 한국어 실력이 취약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글집중 수업 과정을 운영하기도 하고, 또한 브라질 한인들의 브라질 사회 적응을 위해 어른들을 대상으로 하는 포르투갈어 집중 수업과정을 운영하기도 했다.

「쌍빠울로 한국학교」는 3박 4일의 캠프를 진행하기도 하고(1987, 1988), <한글날 기념 낱말 대회>와 <어린이날 기념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그리고 교지 <꿈나무>를 발간하기도 했다. 그리고 노인철 노상철 치과의사들의 도움으로 1986년부터 매년 치아 검진을 실시했다.

현황

김철언이 「쌍빠울로 한국학교」 이사장으로 취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파라과이 한국학교가 설립되어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왔다. 이에 자극을 받은 한국학교 이사들은 「한-브 교육협회」를 조직하고, 브라질에도 한국학교 설립을 서둘렀다. 그것의 결과가 1998년 봉헤찌로에 세워진 「브라질 한국학교 뽈리로고스(Colégio Polilogos)」이다. 이 학교는 한인사회가 1,000만 헤알 - 약 700만 달러 - 을 모금하고, 같은 금액을 한국 정부가 보조하여 세워졌기 때문에, 한국의 교육부는 당연히 학교 운영에 관여하려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한-브 교육협회」와의 마찰로 이어졌다.

학교의 문제점은 두 가지 측면에서 나타났다. 하나는 낮은 학생들의 수준과 투명하지 못한 학교 운영이었다. 이 학교에 다니기를 원하는 학생들은 주로 이민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브라질학교나 국제학교를 갈 수 없는 상태의 한인들이거나, 혹은 학교 주변에 살고 있는 브라질 저소득층이나 최하층민의 자녀들이었다. 그런데 학교의 문제점이 2013년 만천하에 드러나게 된 것은 이 학교가 상파울루 시정부에 내야하는 건물세와 토지세를 내지 못해서 경매에 붙여진 때이다. 브라질사회에서 학교는 원래 면세의 대상이나, 뽈리로고스의 경우, 건물에 대한 시정부의 준공 허가가 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학교를 개교·운영해왔고, 또한 「한-브 교육협회」가 학교 재정 및 운영에 관한 서류들을 한국의 교육부에서 파견된 교장이나 교사 혹은 교육원장이 들여다볼 수 없는 시스템으로 운영함으로써, 그동안 곪아왔던 문제들이 더욱 확대·폭발한 것이었다.

「한-브 교육협회」이사들은 1980년대 브라질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1.5세 엘리트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 브라질의 시장개방정책과 새로운 경제조치에 적응하지 못했다. 따라서 일부는 미국으로 재이주하거나 개인적으로 파산했다. 더군다나 1998년 브라질의 경제위기 그리고 2008년 세계경제위기는 그들로 하여금 이 학교 운영을 더욱 편법으로 운영하게 만들었다.

2013년「한-브 교육협회」는 이 문제의 해결방안으로, 2014년 교과과정 중 중등과정을 없애고 초등학교 과정만을 축소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상파울루 시정부와 협의하여, 그동안 밀린 세금을 10년 할부로 나누어 내는데 동의하고, 학교 운영을 겨우 유지하고 있는 상태이다.

의의와 평가

파라과이에 설립된 한국학교의 성공은, 낮은 파라과이의 교육수준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브라질의 교육수준은 특히 남미 최대 메트로폴리탄인 상파울로의 교육수준은 남미에서 최고 일뿐만 아니라, 상파울로 주립대학의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우수한 대학이다. 더군다나 그동안 브라질은 한국인들이 북미로 가는 길목으로 밖에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1980년대 「쌍빠울로 한국학교」는 미국으로 재이주하려는 브라질 한인들이 자신의 자녀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려는 수요가 컸기 때문에 그만큼 성공적으로 운영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20세기 말에 세워진 「브라질 한국학교 뽈리로고스(Colégio Polilogos)」는 일류를 지향하는 대부분의 한인들의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한 학교였기 때문에, 운영상의 문제가 확대되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쌍빠울로 한국학교를 회고하다」(정우영,『브라질한인이민 50년사(1962~2011)』, 브라질한인이민사편찬위원회, 도서출판 교음사, 2011)
집필자
최금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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