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필암은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사불산에 있는 고려 후기 승려 각관과 김득배의 부인 김씨가 창건한 암자이다. 승려 각관과 김씨는 나옹화상이 입적하자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암자를 짓고, 이색에게 기문을 요청하였다. 이색은 기문의 집필료를 받지 않고 그 돈으로 사찰 건립 비용을 충당하게 하였다. 이에 암자 이름을 윤필암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윤필은 글을 지어 주는 대가로 받는 일종의 사례금을 말한다. 이색은 「윤필암기」에서, 공덕산(사불산의 다른 이름)에 묘적암이 있는데 이곳은 요연선사가 머물고 있을 적에 나옹이 출가했던 곳이라고 하였다.
대승사의 부속암자인 윤필암(潤筆庵)은 고려 후기인 1380년 승려 각관(覺寬)과 김득배(金得培)의 부인 김씨(金氏)가 창건하였다. 나옹화상(懶翁和尙)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만든 사찰로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이 기문(記文)을 썼다.
윤필암은 문경의 사불산에 있는 대승사의 부속 암자이다. 대승사의 창건은 사불산의 산마루에 있는 사면석불상(四面石佛像)과 관련이 있다. 네모의 각 바위 면에 불상이 조각된 사면석불상에 관해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한다. 587년(진평왕 9) 붉은 비단으로 싸인 사면석불상이 하늘에서 떨어지니 왕이 가서 예경(禮敬)하고 그 바위 곁에 절을 창건하여 대승사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름이 전하지 않는 승려에게 절을 맡겨 공양을 올리게 하였다고 한다. 이 설화를 통해 볼 때 대승사는 신라 진평왕 대에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승사의 암자인 윤필암은 1380년(우왕 6) 승려 각관과 찬성(贊成) 김득배의 부인 김씨가 창건하였다. 각관과 김씨는 나옹화상이 입적하자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윤필암을 짓고, 이색에게 기문을 요청하였다. 이색은 기문의 집필료를 받지 않고 그 돈으로 사찰 건립 비용을 충당하게 하였는데, 윤필암이라는 암자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윤필은 원래 글을 지어 주는 대가로 받는 일종의 사례금으로써 집필료를 말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제8 지평현(砥平縣) 불우(佛宇) 조에서는 “이색이 왕명을 받들어 나옹의 부도명을 지었다. 나옹의 문도들이 집필료를 마련하여 사례하였는데, 이색이 받지 않고 그 집필료로써 허물어진 절을 수리하도록 하였다. 이로 인해 (수리한 암자를) 윤필암이라고 불렀다(李穡以王旨撰懶翁浮屠銘 其徒致潤筆物 穡不受使修廢寺 因名之).”라고 하여 명칭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당시 나옹의 사리탑이 있던 신륵사(神勒寺)와 회암사(檜巖寺) 외에도, 묘향산(妙香山) ‧ 금강산(金剛山) ‧ 소백산(小白山) ‧ 사불산(四佛山) ‧ 치악산(雉岳山) ‧ 용문산(龍門山) ‧ 구룡산(九龍山) 등 일곱 곳에 나옹의 진영을 모신 진당(眞堂)을 세우고 사리를 나누어 모셨는데, 이 일곱 곳에 모두 이색이 기문을 써 주었고 윤필암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색은 「윤필암기(潤筆庵記)」에서 이르기를, 공덕산(사불산의 다른 이름)에 묘적암(妙寂庵)이 있는데 이곳은 요연선사(了然禪師)가 머물고 있을 적에 나옹이 출가했던 곳이니 나옹의 본고향이라고 하였다. 이는 나옹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공덕산에 그의 사리를 봉안한 윤필암을 세우는 이유에 대해 설명한 것이다. 그런데 윤필암 경내에는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삼층석탑 2기가 있어서 창건 시기는 더 올라갈 수도 있다.
조선시대에는 1645년(인조 23) 서조(瑞祖)와 탁잠(卓岑), 1765년(영조 41) 야운(野雲), 1806년(순조 6) 취운(醉雲), 1885년(고종 22) 창명(滄溟)이 윤필암을 각각 중건하였다. 근래에는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하였던 청담(靑潭, 19021971)의 속가 둘째 딸이며 대한불교조계종 종정을 역임했던 성철(性徹, 19121993)의 비구니 제자였던 묘엄(妙嚴, 1931~2011)이 출가 수행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