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안은 조선전기 호조참의, 황해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418년(태종 18)에 태어나 1464년(세조 10)에 사망했다. 1441년에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돈녕부 주부, 집현전 지제학 등을 지냈다. 1455년 원종공신에 녹훈되었는데 1456년 단종복위운동에 관련된 혐의로 신문(訊問)을 받았다. 시를 잘 짓고, 전서와 예서, 산수화와 인물화에 뛰어나 삼절로 불렸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오두연수도」와 「산수인물도」·「고사관수도」 등이 있다. 원예에 관한 전문서적 『양화소록』을 저술하였다.
1441년(세종 23)에 식년 문과에 정과로 급제해 돈녕부 주부(主簿)가 되었다. 1443년 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세종이 지은 정음(正音) 28자에 대한 해석을 상세하게 덧붙였다. 1444년 최항(崔恒) · 박팽년(朴彭年) · 신숙주(申叔舟)와 함께 의사청(議事廳)에 나아가 언문(諺文)으로 운회(韻會)를 번역했고, 1445년에는 최항 등과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주석을 붙였다.
1447년 이조 정랑이 되었고, 같은 해 집현전 직제학 최항 · 성삼문(成三問) · 이개(李塏) 등과 『동국정운(東國正韻)』을 완성하였다. 1450년 왕이 위독하자 부지돈녕(副知敦寧)의 직에 있으면서 미타관음(彌陀觀音) 등의 경문(經文)을 썼다. 1454년(단종 2)에 집현전 직제학에 올랐고, 1455년(세조 1)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 1456년에 단종복위운동에 관련된 혐의로 신문을 받았으나 화를 면했다.
후일에 다시 대사헌 신석조(辛碩祖)와 좌사간(左司諫) 이종검(李宗儉)이 처벌을 요구했지만 왕의 비호로 무사할 수 있었다. 1460년 호조 참의 겸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고, 1462년에 인순부윤(仁順府尹)으로서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표 · 전(表箋)을 받들고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63년에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가 되었다. 1464년에 사망했다.
시와 글씨, 그림에 모두 뛰어나 ‘삼절(三絶)’이라 불렸으며, 특히 전서(篆書) · 예서(隷書)와 팔분(八分)에도 독보적인 경지를 이루었다. 시는 위응물(韋應物) · 유종원(柳宗元)과 같다는 평이 있으나 자신의 글을 세상에 발표하기를 꺼려 전하는 것이 없다. 그림은 송나라의 유용(劉墉) · 곽희(郭熙), 글씨는 진(晉)나라의 왕희지(王羲之)와 원(元)나라의 조맹부(趙孟頫)에 비견되기도 했다.
기록상으로 전하는 작품들을 살펴보면, 작은 풍경화를 묵화로 즐겨 그렸다. 그리고 영모화(翎毛畵) · 산수화 · 인물화에도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작품으로는 「여인도(麗人圖)」가 유명하고 청학동(靑鶴洞) · 청천강(菁川江)의 두 족자와 「경운도(耕雲圖)」는 기보(奇寶)라 할 수 있다.
1454년(단종 2) 산천 형세를 잘 아는 예조 참판 정척(鄭陟), 지도에 밝은 직전(直殿) 양성지(梁誠之)와 함께 수양대군이 주도한 8도 및 서울의 지도 제작에 참여했다. 1445년 명나라에서 보내온 ‘體天牧民永昌後嗣(체천목민영창후사)’의 여덟 자 옥새를 만들었는데 조정에서 추천해 쓰게 했다. 세조 때에 임신자(壬申字)를 녹여서 새로 글자를 주조할 때 글씨를 직접 썼는데, 이를 을해자(乙亥字)라고 하였다.
글씨 쓰기를 꺼려 필적으로 세상에 전하는 것이 드물다. 성격은 온화하고 말이 적으며 청렴 · 소박하고 물리에 통달했고 또 번거로운 것을 싫어하고 고요한 것을 사랑해 젊어서부터 영달을 구하지 않았다. 일찍이 의정부에서 검상(檢詳)으로 추천하려 했으나 끝까지 사양해 한때 오해를 받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원예에 관한 전문서적인 『양화소록(養花小錄)』이 있는데, 여기에는 꽃을 가꾸는 일을 경륜(經綸)의 뜻에 비추어 서술하고 있다.
그림으로는 「오두연수도(橋頭烟樹圖)」와 「산수인물도(山水人物圖)」 ·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 · 「고사도교도(高士渡橋圖)」 · 「강호한거도(江湖閑居圖)」 등이 있으며, 글씨로는 「강지돈녕석덕묘표(姜知敦寧碩德墓表)」와 「윤공간공형묘비(尹恭簡公炯墓碑)」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