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선은 임진왜란 당시 수전에서 활약한 거북 모양의 전투선이다. 정식 명칭은 귀선(龜船)이다. 거북선은 조선 수군의 주력 전선인 판옥선의 상체 부분을 개량해서 덮개를 덮은 구조이다. 판옥선은 1층은 노를 젓는 공간이고 2층은 전투공간이었는데, 여기에 덮개를 만들고 칼과 송곳을 꽂아 개량함으로써 일본 수군의 백병전술에 대비한 돌격전함이었다. 『태종실록』에도 귀선에 관한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전부터 우리가 발전시켜온 뛰어난 배 건조기술을 바탕으로 탄생한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에서의 활약상은 일본의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나라 전선의 구조와 형식은 주로 해적선과의 싸움을 통해 발전되었다. 고려 때부터 여진 해적이나 왜구와의 싸움에서 우리가 주로 사용한 전술은 배를 부딪쳐 해적선을 깨뜨리는 방법이나 화포를 사용하여 적선을 소각시키는 것이었다. 반면에 해적들은 상대방의 배에 접근한 후 배로 뛰어들어 싸우는 육박전을 주로 사용하였다. 이것을 막기 위해서는 적이 우리의 배에 뛰어들지 못하게 해야 했다. 그러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 이른바 ‘거북선[龜船]’이었다.
『태종실록(太宗實錄)』의 기록에 따르면, 1413년(태종 13)에 임금이 임진(臨津) 나루를 지나다가 거북선과 왜선(倭船)이 서로 싸우는 상황을 구경하였다고 한다. 또 1415년 탁신(卓愼)은 국방 문제를 논하면서 “거북선[龜船]의 법은 많은 적과 충돌하여도 적이 능히 해를 입히지 못하니 가히 결승(決勝)의 좋은 계책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시 견고하고 교묘하게 만들게 하여 전승(戰勝)의 도구를 갖추게 하소서”라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거북선의 제도는 이미 조선 초기에 갖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태종 때 만들어진 거북선은 그 후 적극적으로 활용되지 않았던 것 같고, 이것이 임진왜란 때 이순신에 의해 다시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거북선과 관련하여 임진왜란의 와중에 이덕홍(李德弘)이 제작을 건의한 ‘귀갑선(龜甲船)’이 주목된다. 그는 왜적들의 장기가 조총으로 대표되는 ‘철환(鐵丸)’에 있다고 지적하면서, 왜적들이 성세를 올리는 것이 바로 이것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덕홍이 생각하기에 왜적의 ‘철환’을 막는 방법은 왜적들이 육지에 올라서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최선책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두 가지를 고안하였다. 하나는 왜적의 배가 육지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포구에 ‘침수진목전(沉水眞木箭)’을 설치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가 바로 ‘귀갑선’의 제작이었다.
이덕홍이 생각한 ‘귀갑선’의 제도는 다음과 같았다. “귀갑선의 제도는 등 부분에 창검(鎗劒)을 부착하고 머리 부분에 쇠뇌(伏弩)를 숨겨 두고, 허리 부분에 작은 판옥(板屋)을 만들어서 사수(射手)가 그 가운데 들어갈 수 있게 한다. (판옥의) 곁으로는 쏘는 구멍[射穴]으로 통하고, 아래로는 배의 중심부에 통하게 한 다음, 가운데에 총통(銃筒)과 큰 도끼[大斧]를 싣는다. 그리하여 때려 부수거나 포를 쏘아 대고, 쏘거나 들이치면 적들이 비록 많이 몰려오더라도 반드시 (우리 편을) 어찌하지 못할 것이다.” 이순신의 거북선과 상당히 유사한 내용임을 알 수 있다.
거북선은 뛰어나고 독창적인 배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이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거북선은 그 이전의 배무이(선박건조) 기술의 바탕 위에서 출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되어 온 배무이 기술이 거북선의 탄생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통일신라 시기의 장보고의 해상 활동이나 고려 왕조의 활발한 무역 활동은 모두 훌륭한 배의 존재를 전제로 가능한 일이었다. 고려시기 배무이의 전통이 조선왕조에 계승되어 판옥선과 거북선을 출현하게 하였던 것이다.
조선의 싸움배는 판옥선이 주축이었다. 그것은 배 위 갑판을 덮어 다시 그 위에 누각이나 다른 건조물을 세운 구조를 가진 배였다. 즉 2층 구조로 이루어져 1층에서는 노를 젓고, 2층에서는 전투를 하게 만든 것이었다. 갑판 아래서 노를 젓는 노군들을 적의 화살이나 화포로부터 직접 공격당하지 않게 지붕을 덮은 것이었는데, 거북선은 이러한 판옥선 위에 다시 덮개를 씌운 것이었다. 적들이 아군의 배에 뛰어들어 발을 붙이지 못하게 고안된 것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의 구조적 특징을 알 수 있는 기록으로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의 1592년(선조 25) 5월 1일의 기사를 들 수 있다. “이에 앞서 (이)순신은 전투 장비를 크게 정비하면서 자의로 거북선을 만들었다. 이 제도는 배 위에 판목을 깔아 거북 등처럼 만들고 그 위에는 우리 군사가 겨우 통행할 수 있을 만큼 십자(十字)로 좁은 길을 내고 나머지는 모두 칼 · 송곳 같은 것을 줄지어 꽂았다. 그리고 앞은 용의 머리를 만들어 입은 총구멍[銃穴]으로 활용하였으며, 뒤에는 거북의 꼬리를 만들어 꼬리 밑에 총구멍을 설치하였다.
좌우에도 총구멍이 각각 여섯 개가 있었으며, 군사는 모두 그 밑에 숨어 있도록 하였다. 사면으로 포를 쏠 수 있게 하였고 전후좌우로 이동하는 것이 나는 것처럼 빨랐다. 싸울 때에는 거적이나 풀로 덮어 송곳과 칼날이 드러나지 않게 하였는데, 적이 뛰어오르면 송곳과 칼에 찔리게 되고, 덮쳐 포위하면 화총(火銃)을 일제히 쏘았다. 그리하여 적선 속을 횡행(橫行)하는데도 아군은 손상을 입지 않은 채 가는 곳마다 바람에 쓸리듯 적선을 격파하였으므로 언제나 승리하였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①기존의 배[판옥선] 위에 판목을 깔아 거북 등처럼 만들었다, ②군사가 통행할 수 있는 십자로를 만들고 나머지는 칼과 송곳을 줄지어 꽂았으며, 싸울 때는 거적이나 풀로 덮어 배 위에 올라타려는 적군에게 상처를 입혔다, ③배의 앞에는 용의 머리를 만들어 그 입을 대포 구멍으로 활용했으며, ④배의 뒤에는 거북의 꼬리를 만들고 그 밑에 총구멍을 설치했다, ⑤배의 좌우에 총구멍을 여섯 개씩 설치하였다, ⑥사면으로 포를 쏠 수 있게 하였다, ⑦전후좌우로 이동하는 것이 빨랐다는 점 등이다. 아군의 병력을 보호하고 적의 접근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면서 적진을 휘젓는 돌격선으로서의 거북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 가운데 거북선의 모습과 규모에 대해서 『선조수정실록』의 기록보다 더 상세한 내용은 없다. “크기가 판옥선만하다”는 언급을 통해 거북선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지만 판옥선의 정확한 규모 역시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격군(格軍)과 사수를 합쳐 125명이 승선했다는 기록은 확인할 수 있다. 현존하는 기록 가운데 거북선의 규모와 특징에 대해 가장 자세하게 기록한 문헌은 1795년(정조 19) 정조의 명에 의해 편찬된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이다. 이순신의 사후 그를 왕조에 충성을 다한 충신으로 추대하는 움직임은 정조대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이충무공전서』의 편찬은 그와 같은 사업의 일환이었다. 당시 규장각 문신인 윤행임(尹行恁)이 편찬 책임을 맡았던 『이충무공전서』에는 이순신의 일기 · 장계와 그를 예찬하는 여러 사람들의 시문, 비명 등이 수록되었다. 이 책의 권수(卷首) ‘도설(圖說)’ 부분에는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의 구조를 추정할 수 있는 두 장의 거북선 그림과 그에 대한 설명문이 기재되어 있다. 두 개의 거북선은 통제영 거북선과 전라 좌수영 거북선인데, 이 가운데 통제영에 있던 거북선이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에서 유래한 것이며, 다만 치수에 가감이 있다고 하였다.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된 통제영 거북선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밑바닥 판[底版]은 10쪽을 이어 붙였다. 그것의 길이는 64척 8촌이다. 머리 쪽 폭은 12척, 허리 쪽 폭은 14척 5촌, 꼬리 쪽 폭은 10척 6촌이다.
오른쪽과 왼쪽의 현판(舷版, 배의 외판, 바깥판)은 각각 7쪽을 아래에서 위로 이어 붙였다. 높이는 7척 5촌이다. 맨 아래 첫 번째 판자의 길이는 68척이지만 차츰 길어져서 맨 위 7번째 판자에 이르러서는 113척이 된다. 판자의 두께는 모두 4촌씩이다.
노판(艣版, 배의 전면부)은 배 앞쪽에 4쪽을 이어 붙였다. 높이는 4척이다. 두 개의 판이 왼쪽, 오른쪽에 있는데 현자(玄字) 구멍을 내어 각각에 박혈(礟穴, 돌노쇠 구멍)을 두었다.
주판(舳版, 배 뒤쪽 고물)에도 7쪽을 이어 붙였다. 높이는 7척 5촌이다. 위의 폭은 14척 5촌이고 아래쪽 폭은 10척 6촌이다. 6번째 판 가운데에 구멍을 뚫고 둘레 1척 2촌의 키를 꽂았다.
좌우 뱃전판[舷]에는 난간[欄]이 설치되어 있다. 난간 머리에 서까래가 세로로 가로질렀는데, 바로 뱃머리 앞에 닿게 된다. 마치 소나 말의 가슴에 멍에를 메인 것과 같은 모습이다.
난간을 따라 판자를 깔고 그 둘레에는 패(牌, 네모 방패)를 둘러 꽂았다. 방패 위에 또 난간을 만들었다. 현의 난간에서 패의 난간에 이르는 높이는 4척 3촌이다.
방패의 난간 좌우에는 각각 11쪽의 판자가 비늘처럼 서로 마주 덮고 있다.
배의 등에는 1척 5촌의 틈을 내어 돛대를 세웠다 뉘었다 하는 데 편하게 했다.
뱃머리에는 거북머리[龜頭]를 설치했다. 길이는 4척 3촌, 넓이는 3척이다. 그 속에서 유황염초를 태워 벌어진 입으로 안개처럼 연기를 토하여 적을 혼미하게 한다.
좌우의 노는 각각 10개이다.
왼쪽과 오른쪽 22개의 방패에는 각각 박혈(礟穴)을 뚫었고, 12개의 문을 두었다.
거북머리 위에도 두 개의 박혈(礟穴)을 냈다. 그 아래에 두 개의 문을 냈다. 문 옆에는 각각 박혈(礟穴) 한 개씩을 두었다.
왼쪽과 오른쪽의 덮개 판목[覆版] 12개에도 각각 박혈(礟穴)을 뚫었으며 ‘귀(龜)’자가 적힌 기를 꽂았다.
왼쪽과 오른쪽의 포판(鋪版, 갑판)에는 방이 각각 12칸이다. 그 가운데 두 칸에는 철물을 넣어두고, 세 칸에는 화포, 활, 화살, 창, 칼 등을 넣어두고, 나머지 열아홉 칸은 군사들의 휴식처로 쓴다.
왼쪽 갑판 위에 있는 방 한 칸은 선장이 거처하고, 오른쪽 갑판 위의 방 한 칸은 장교들이 거처한다.
군사들은 쉴 때는 갑판 아래에 있고, 싸울 때는 갑판 위로 올라와 모든 대포구멍에 대포를 대놓고 쉴 새 없이 쟁여 쏜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 통제영 거북선의 대체적인 형태를 그려볼 수 있다. 그것은 판옥선의 갑판 주위에 둘러쳐진 여장을 제거하고 갑판 위에 바로 거북 뚜껑을 덮은 모양이다. 노는 현의 난간 부근에 좌우 각각 10개를 설치하였다. 거북선의 대포 구멍[礟穴]은 배 양쪽의 22개, 앞쪽 거북머리의 위 아래 4개, 배 위의 거북등에 12개가 설치되었다. 전방위 포격이 가능하도록 구상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전라좌수영 거북선은 통제영 거북선과 치수 · 길이 · 넓이 등은 같지만 다른 모양을 하고 있다. 마치 판옥선의 여장을 그대로 두고 거기에 뚜껑을 씌운 듯한 모습이다. 거북머리 아래에 귀신의 머리를 새겼고, 덮개 위에 거북무늬를 새겨 넣었다. 대포구멍은 거북머리 아래에 2개, 현판 좌우에 각각 1개, 현의 난간 좌우에 각각 10개, 덮개 판목 좌우에 각각 6개씩 있었다. 노는 좌우에 각각 8개를 설치하였다.
거북선의 구체적인 구조와 기능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많은 논란이 있다. 그 가운데는 견해차가 뚜렷한 논의들도 적지 않다.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물론 거북선의 실물을 확인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실물의 확인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원형을 찾는 작업은 임진왜란 당시와 그 이후의 거북선에 대한 기록들을 토대로 더듬어 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자료들이 단편적이고 해석도 어렵다는 데 또 다른 문제점이 있다.
거북선의 구조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그림 자료는 여러 가지 있지만 대표적인 것은 『이충무공전서』의 앞부분에 실려 있는 두 개의 그림이다. 흔히 ‘통제영(統制營) 거북선’과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 거북선’으로 불리는 것이다. 문제는 양자의 제도에 상당한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이것이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도 아니라는 점이다. 『이충무공전서』가 편찬된 것은 임진왜란 이후 200여 년이 경과한 1795년(정조 19)이었다. 결국 거북선의 원형을 찾는 작업은 『이충무공전서』의 기록을 토대로, 그 이외에 실록 기사와 회고록 등의 단편적인 자료를 참조하고,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조선기술의 발전 과정을 염두에 두고 차근차근 접근하여야 할 것이다.
거북선과 관련된 논란에서 가장 먼저 제기되는 문제는 거북선이 언제 누구에 의해 창시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태종 때 이미 거북선이라는 이름을 가진 배가 있었다. 따라서 이것과 임진왜란 때의 거북선이 어떤 관계에 있었는가, 양자는 구조면에서 같은 배인가를 밝히는 것이 거북선의 창시 문제에서 중요한 관건이 된다. 아마도 태종 때의 거북선은 실전에 활용되지 못하였던 것 같으며, 세종대 이후 왜구의 격감 등을 고려한 전략적 판단에 의해 사라졌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따라서 임진왜란 때의 거북선은 이순신과 그의 부하 군관들이 종래의 거북선을 개조하여 실용적으로 만든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두 번째 문제는 거북선이 과연 ‘철갑선’인가 하는 점이다. 거북선이 철갑선이라는 주장의 유래가 무엇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 이야기와 일본측 문헌자료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런데 일찍부터 일본측의 자료는 그 신빙성을 의심받아 왔다. 임진왜란의 패전을 거북선에 돌리려는 숨은 의도가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유길준(兪吉濬)은 『서유견문(西遊見聞)』에서 “이충무공의 거북선은 철갑병선(鐵甲兵船)으로 세계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였고,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거북선을 ‘세계 최초의 철갑선’으로 정의하였지만 근거가 확실한 주장은 아니었다. 물론 거북선의 등에는 거북 무늬를 그렸을 뿐만 아니라 그 위에 날카로운 못이나 칼날(칼송곳) 같은 것을 꽂아 적의 접근을 근본적으로 차단하였다. 그러나 거북선의 표면에 철갑이 덮여 있었는지의 여부는 아직 정확히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철갑을 덮을 경우에 배의 무게가 증가하여 민첩성이 떨어지고, 바닷물에 의해 부식되는 등 효율적이지 않다는 점을 들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다음으로 복잡한 문제는 거북선의 세부적인 구조이다. 거북선의 내부구조는 어떻게 되어 있었던 것일까? 거북선에서 사용하였던 노는 어떻게 생긴 것이며, 노역의 위치와 노역의 공간은 어디인가? 포 구멍의 실질적인 쓰임새와 뱃머리에 설치된 거북머리[용두(龍頭)]의 기능은 무엇인가? 이러한 여러 문제들은 거북선의 내부가 2층 구조였는가, 아니면 3층 구조였는가 하는 논란과 연결된다.
2층 구조론에 따르면, 아래층에는 병사의 휴게실과 무기고를 설치하고, 위층에는 화포 등의 공격 시설이 배치되어 있는 것으로 설명된다. 이 경우 노를 젓는 노역이 화포와 같은 장소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좁은 공간에 많은 인원이 탑승하는 단점이 있어 전투효율이 떨어진다”는 평가는 이러한 거북선의 구조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반면에 3층 구조론에 따르면 1층에는 병사들의 침실과 군량 · 무기고가 있었고, 2층에는 사부(사격수)와 격군이 자리하며, 3층에는 포대가 설치되어 화포를 쏠 수 있는 구조였다고 한다. 따라서 노역의 위치가 2층 구조론의 주장과 달라지고, 전투의 효율성에 대한 평가도 상반된다.
거북선의 크기와 배의 척수 역시 논쟁거리였다. 거북선의 크기와 척수는 시대에 따라 변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분명하게 확인되는 것은 거북선의 척수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거북선의 기능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부분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거북선은 돌격용 전함이었다. 탑승자 전원을 덮개 밑에 수용함으로써 적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고, 적진을 휘젓고 다니며 공격하는 데 유리한 전함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적선과 접전을 벌일 때에는 매우 적합하지만, 도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공격을 가하는 데는 불편한 점도 있었다. 은폐된 거북선 안에서의 활동이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는 상갑판 위의 넓은 공간에서 마음껏 활동할 수 있는 판옥선이 훨씬 실용적이었다. 거북선의 척수가 제한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요컨대 거북선은 일본 해적 집단과 일본 수군의 백병전술에 대비해 개발한 돌격전함이었다. 즉 여러 개의 중화기로 무장한 연해용 돌격전함으로서, 독특한 아이디어로 설계된 특이한 모델의 전선이었던 것이다. 전체적으로 거북 모양에, 용머리에서는 포를 쏘거나 유황 연기를 내뿜었다고 하니, 이런 새로운 디자인의 전투함은 적을 당황케 하여 사기를 꺾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전라남도 여수시는 거북선을 하나의 축제로 승화시켜 ‘여수거북선축제’를 매년 시행하고 있다. 이 축제는 1967년부터 시작하여 2013년 현재 47회에 이르고 있다. 축제프로그램으로는 ‘통제영 길놀이’, ‘둑제’, ‘거북선그리기 · 만들기’, ‘승전한마당’, ‘수륙고혼천도대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거북선이 임진왜란에서 승전을 올리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한 이후 조선과 일본의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었다. 거북선에 대한 다양한 그림은 그러한 관심의 일환이었다고 여겨진다. 현재까지 전하는 거북선 그림은 10여 종에 달한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된 통제영과 전라좌수영의 거북선으로 가장 신빙성 있는 기록으로 간주된다. 흥미로운 것은 일본에서 도요토미 히데오시의 일대기를 그림으로 그리고 해설한 책 가운데 『회본태합기(繪本太閤記)』에 실린 거북선 그림으로, “이순신이 거북선을 만들어 일본군을 물리치다”라는 설명문이 붙어 있다.
1910년 경상남도 고성에서 발굴되어 현재는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청화백자에는 용머리에서 연기를 토하고 있는 모습의 거북선이 그려져 있다.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는 10폭짜리 병풍으로 된 「거북선해진도」도 소장되어 있다. 여기에는 거북선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전선(戰船)의 포진 상황이 그려져 있다.
한편 이순신 후손의 종가에서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두 종의 거북선 그림이 있는데, 다른 거북선 그림과는 달리 거북선의 등 위에 두 개의 돛대가 달려 있고, 지휘소라 할 수 있는 장대가 설치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아울러 거북선의 크기를 비롯해 구조, 장대 설치 등에 대한 설명도 첨부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