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읍성 ()

건축
유적
문화재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에 있는 석축 읍성.
이칭
이칭
모양성(牟陽城)
유적
건립 시기
조선 초기
관련 국가
조선
높이
4~6m
둘레
1,684m
면적
189,764㎡
소재지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사적(1965년 04월 01일 지정)
소재지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
내용 요약

고창읍성(高敞邑城)은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에 있는 조선시대 석축 읍성이다. 모양성(牟陽城)이라고도 부른다. 일반적인 다른 읍성들이 해당 고을의 읍내 한가운데 자리한 데 비해 고창읍성은 고창의 진산인 반등산(半登山)을 에워싸며 축조되었다. 고창읍성은 단종 1년(1453)에 축조되었다는 설도 있고 숙종 때 축조되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읍성의 성돌에 계유년(癸酉年)에 축조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단종 1년 혹은 그 이전인 태조 2년(1393)에 축조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정의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에 있는 석축 읍성.
발굴경위 및 결과

고창읍성(高敞邑城)은 주1, 해미읍성과 더불어 대표적인 읍성 유적이다. 고창읍성의 성내에는 22채에 이르는 많은 관아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이 관아 건물들을 정비하고 복원하기 위한 기초 자료를 확보하기 위하여 고창읍성에 대한 발굴 주2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관아를 비롯한 주3가 발굴되어 읍성이 복원되었다.

건립경위

고창군 일대는 고려 말 이래로 왜구의 침입이 빈번했던 곳이다. 그래서 고창현, 무장현, 흥덕현에 각각 읍성을 축조하고, 동헌이나 객사, 향교도 설치하였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고창읍성은 왜구를 방어할 목적으로 축조한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고창읍성이 일반적인 다른 읍성들처럼 평지 그것도 읍내의 한가운데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읍내에서 남쪽으로 약간 떨어진 반등산에 세워진 것도 그 때문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변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창읍성에 대해 둘레가 3,080척이며 높이는 12척인 성으로 성내에 연못 2개소와 우물 4개소가 있다고 적혀 있다. 『동국여지지』에는 북문이 하나 있다는 사실이 덧붙여져 있다.

형태와 특징

고창읍성은 고창 지역의 주10이라고 할 수 있는 반등산을 에워싼 형태로 축조되었다. 반등산이 고창읍의 남쪽에 있어 읍성은 북쪽을 향해 축조되었다. 따라서 읍성은 남고북저(南高北低)의 지형에 따라 지어졌으며, 북문이 정문이다. 성벽에 '제주시(濟州始)', '화순시(和順始)', '나주시(羅州始)' 등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전라도의 여러 고을을 동원하여 성을 쌓은 것을 알 수 있다. 아울러 '계유년(癸酉年)'에 축조했다는 주11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단종 1년(1453) 혹은 그 보다 이른 태조 2년(1393)에 읍성이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성벽은 일반적인 읍성처럼 자연 할석을 이용하여 허튼층쌓기 방식으로 축조하였다. 성벽의 하단에서 상단으로 올라갈수록 사용된 성돌의 크기가 작아진다. 성돌과 성돌 사이에는 틈이 많아 작은 쐐기돌 같은 것으로 메워 넣었다. 성돌 중에는 주12이나 당간 주9 같은 것들도 들어 있어 폐사지 같은 데서 옮겨온 돌도 성을 쌓는 데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읍성과 관련된 부대시설로는 성문, 주4, 주5, 건물지, 우물, 연못, 수구문 등이 있다.

성문은 동문, 서문, 북문이 있다. 그중 현재의 고창 읍내 방향으로 통하는 북문이 정문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3개의 성문에는 옹성이 마련되어 있으며, 성벽을 따라 모두 6개소의 치성이 있다. 연못 2개소에 우물도 4개소 있고 주6도 두 군데 있다. 성내에는 모두 22채의 관아 건물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북문의 문루인 공북루(拱北樓)이다. 읍성의 정문은 주7으로 만드는 것이 보통인데, 고창읍성의 공북루는 주춧돌 위에 문루를 세우고 문을 만들었다. 즉 고창읍성의 정문 격인 공북루는 마치 관아의 주8과 같은 형태를 띠고 있는 특징을 지닌다.

의의 및 평가

고창읍성은 일반적인 다른 읍성과 달리 방어 기능을 강화한 읍성이다. 따라서 읍성을 읍내의 한가운데에 만든 것이 아니라 읍내에서 조금 떨어진 반등산(半登山)에 세웠다. 반등산은 고창의 진산(鎭山)으로 이라고 할 수 있는데, 고창읍성은 이러한 반등산의 정상부에서 산자락에 걸쳐 성이 축조된 것이다.

한편, 부녀자들이 고창읍성을 쌓았다는 전설이 있다. 이러한 전설은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부녀자들이 매년 '성밟기' 행사를 하며 전승되고 있다. 주13를 하면 잔병 없이 오래 살고, 극락왕생한다는 속설이 있는데, 특히 저승문이 열리는 윤달에 성을 밟으면 더욱 좋다고 한다.

참고문헌

원전

『고창군읍지(高敞郡邑誌)』
『동국여지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단행본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고창읍성 동헌지발굴조사보고서』(고창군, 1987)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고창읍성 관아건물지 발굴조사보보고서』(고창군, 1991)
김선기, 『고창읍성 관아건물지 발굴조사보보고서』(고창군, 2000)
주석
주1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에 있는 조선 시대의 읍성. 형태는 사각형이며 길이는 1,410미터에 달한다. 성안은 전통적인 마을의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다. 사적 정식 명칭은 ‘순천 낙안 읍성’이다. 우리말샘

주2

땅속에 묻혀 있는 것을 파내서 그것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조사. 또는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을 찾아 밝혀내기 위해 하는 조사. 우리말샘

주3

어떤 건물이 있던 터. 우리말샘

주4

쇠로 만든 독처럼 튼튼하게 둘러쌓은 산성이라는 뜻으로, 방비나 단결 따위가 견고한 사물이나 상태를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5

성 위에 낮게 쌓은 담. 여기에 몸을 숨기고 적을 감시하거나 공격하거나 한다. 우리말샘

주6

물을 끌어 들이거나 흘려 내보내는 터. 우리말샘

주7

공중에 떠 있는 물방울이 햇빛을 받아 나타나는, 반원 모양의 일곱 빛깔의 줄. 흔히 비가 그친 뒤 태양의 반대쪽에서 나타난다. 보통 바깥쪽에서부터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남, 보라의 차례이다. 우리말샘

주8

바깥 담에 세 칸으로 세운 대문. 우리말샘

주9

당간(幢竿)을 받쳐 세우는 기둥. 우리말샘

주10

도읍지나 각 고을에서 그곳을 진호(鎭護)하는 주산(主山)으로 정하여 제사하던 산. 조선 시대에는 동쪽의 금강산, 남쪽의 지리산, 서쪽의 묘향산, 북쪽의 백두산, 중심의 삼각산을 오악(五嶽)이라고 하여 주산으로 삼았다. 우리말샘

주11

글로 명백히 기록된 문구. 또는 그런 조문(條文). 우리말샘

주12

기둥 밑에 기초로 받쳐 놓은 돌. 우리말샘

주13

부녀자들이 성 주위를 도는 민속놀이. 우리말샘

관련 미디어 (3)
집필자
서정석(공주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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