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 ()

근대사
인물
우리나라 개화운동의 대표적 인물이자 갑신정변의 주모자.
이칭
백온(伯溫)
고균(古筠), 고우(古愚)
시호
충달공(忠達公)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51년(철종 2)
사망 연도
1894년(고종 31)
본관
안동(安東)
출생지
충청남도 아산
주요 저서
기화근사(箕和近事)|치도약론(治道略論)|갑신일록(甲申日錄)
주요 경력
개화당 조직|갑신정변 단행
관련 사건
갑신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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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김옥균은 우리나라 개화운동의 대표적 인물이자 갑신정변의 주모자이다. 1870년대 개화사상을 수용하였고 개화당을 조직하였다. 1884년 12월 우정국 준공 축하연 날에 갑신정변을 단행하였다. 청국으로부터의 독립과 양반 지배체제 청산 등의 정령을 반포하는 개혁을 진행하였지만, 46시간 만에 실패로 끝났다. 이후 일본으로 망명하였다가 1894년 다시 상하이로 망명하였으나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당하였다. 갑오개혁 시기에 사면 복권되었고, 1910년에 충달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정의
우리나라 개화운동의 대표적 인물이자 갑신정변의 주모자.
인적사항

김옥균(金玉均, 1851~1894)은 충청남도 아산 출생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백온(伯溫), 호는 고균(古筠) 또는 고우(古愚)이다. 1851년에 김병태(金炳台)의 장남으로 태어나 7세 때 당숙 김병기(金炳基)에게 입양되어 한성(지금의 서울특별시)에서 성장하였다. 11세 때인 1861년 양아버지 김병기가 강릉부사에 임명되어 임지(任地)에 가자, 양아버지를 따라 강릉에 가서 16세까지 율곡사당(栗谷祠堂)이 있는 서당에서 이이(李珥) 학풍의 영향을 받으며 공부하였다.

주요 활동

1872년 22세에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874년 이후 박규수와 접촉하여 개화사상을 수용하였고, 이후 홍영식, 서광범, 박영효 등과 함께 개화당을 조직하였다. 1879년 개화승 이동인을 일본에 파견해 일본의 근대화 실태를 알아보게 하였고,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의 파견 주선을 유도하였다. 국내에서 혁신의 뜻을 가지고 있는 관리들과 청년들을 모아 개화당의 세력 확장에 진력하였다.

김옥균은 스스로 일본의 근대화 실정을 시찰하기 위해 1881년 음력 12월 일본에 건너갔다. 일본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의 진전 과정을 돌아보고 일본의 대표적인 정치가들과도 접촉하여 그들의 정치적 동향 등을 상세히 파악하였다. 돌아오는 도중 일본의 시모노세키〔下關〕에 이르렀을 때, 본국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귀국하였다.

제1차 도일(渡日) 직후에 『기화근사(箕和近事)』를 편찬하였다. 이때 일본의 정치가들과 접촉하여 국제정치 등을 파악하였다. 이후에도 1882년 수신사 일행으로도 참가하여 일본에 갔다. 그리고 1883년 6월부터 1884년 5월까지 약 1년간 체류하면서 차관(借款) 300만 원을 구하기 위해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와 교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귀국 후 그는 조선의 상황에서는 정변(政變)이 필요하다고 인식하고,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준공 축하연 날에 갑신정변을 단행하였다. 우선 축하연에 참석한 민영익에게 부상을 입힌 후 국왕과 왕비를 경우궁으로 옮겨 50여 명의 개화파 군사력과 200여 명의 일본군으로 호위케 하고 수구파 우두머리를 처단하였다.

이어서 개화파들은 홍영식이 우의정, 박영효가 좌포도대장, 서광범이 우포도대장, 김옥균이 호조참판이 되어 군사권과 재정권을 장악하고 정령을 제정 · 발표하였다. 정변의 실패로 정령 · 정책이 실현되지는 못하였지만, 그중 14개 조가 뒷날 김옥균이 일본에 망명하여 저술한 『 갑신일록(甲申日錄)』에 실려 있다.

주요 내용은 청국에 대한 종속 관계 청산, 문벌 폐지와 인민 평등권의 제정 및 능력에 따르는 인재 등용, 지조법(地租法) 개혁, 탐관오리 처벌, 백성들이 빚진 환자미(還子米)의 영원한 면제, 모든 재정의 호조 관할, 경찰 제도의 실시, 혜상공국(惠商工局)의 혁파 등이었다.

청국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지향하였다. 아직 국민국가 수립을 위한 적극적인 자세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양반 지배체제 청산을 시도하였다. 또한 뒷날 동학운동에서 요구된 농민적 토지 소유가 제기되지는 않았으나 지조법의 개혁이 제시되었고, 왕실 경비와 정부 재정을 구분하고 호조가 국가 재정을 전담케 하며 특권 상인의 존재를 부인한 것 등은 개화파의 국정 개혁 의지를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국왕의 정치 혁신 조서가 내려짐과 동시에 청군의 공격으로 일본군이 패퇴하자 갑신정변은 실패로 돌아갔다. 정변이 실패한 후 일본 측은 오히려 공사관이 불타고 공사관 직원과 거류민이 희생된 사실에 대한 책임을 물어와 1885년 1월 한성조약이 체결되었다.

김옥균은 박영효 · 서광범 · 서재필 등 9명의 동지들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여 1884년 12월 13일 나가사키〔長崎〕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정변에 실패한 그와 그의 동지들을 푸대접하였다. 이들의 망명 사실은 곧바로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다.

갑신정변의 사후 조치로 조선 및 청국과의 교섭이 예정되어 있던 일본 정부는 갑신정변에 대한 책임 회피를 외교 방침으로 채택하였던 것이다. 결국 일본 정부는 김옥균을 1886년 8월 오가사와라섬〔小笠原島〕에 귀양을 보냈으며, 1888년에는 홋카이도〔北海道〕로 추방하여 연금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1894년 3월 다시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으나 자객 홍종우에 의해 암살당하였다. 이후 시신은 비밀리에 조선으로 송환되어 다시 능지처참되었다. 4개월 뒤 갑오개혁으로 개화파 정부가 수립되자, 이듬해 법부대신 서광범과 총리대신 김홍집의 상소에 의해 사면, 복권되었다.

이후 을미사변, 아관파천, 을사조약, 국권피탈 등으로 이어지는 혼란한 시국 속에서도 김옥균은 근대적 문명개화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러일전쟁, 을사조약 등 1900년대 초반의 격변은 그를 사회적으로까지 복권시켰다. 1910년에 김옥균은 급기야 충달공(忠達公)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규장각 대제학으로 추증되었다.

학문과 저술 · 사상과 작품

저서로는 『기화근사(箕和近事)』 · 『치도약론(治道略論)』 · 『갑신일록(甲申日錄)』 등이 있다.

참고문헌

원전

『오호고균거사(嗚呼古筠居士)』
『조선지위인(朝鮮之偉人)』

단행본

박은숙, 『김옥균, 역사의 혁명가 시대의 이단아』(너머북스, 2011)
조재곤, 『그래서 나는 김옥균을 쏘았다』(푸른역사, 2005)
이광린, 『개화당연구』(일조각, 1973)
민태원, 『갑신정변과 김옥균』(국제문화협회, 1947)
『김옥균전』(고균기념회, 1944)

논문

한성민, 「망명자 김옥균(金玉均)에 대한 일본의 처우와 조선정책(1884~1890)」(『역사와 현실』 109, 한국역사연구회, 2018)
김성혜, 「1886년 일본망명자 김옥균 유폐의 전말과 그 원인」(『아세아연구』 161,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2015)
허동현, 「개화기 인물사연구의 현황과 과제 -국민국가 만들기의 주역 김옥균 · 박영효 · 어윤중을 중심으로-」(韓國人物史硏究 1, 한국인물사연구소, 2004)
琴秉洞, 「金玉均と日本-その滯日の軌跡-」(綠蔭書房, 1991)
신용하, 「김옥균의 개화사상」(『동방학지』 46 · 47 · 48합집,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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