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굴산파 ()

불교
단체
신라 말에, 형성된 선문구산(禪門九山) 중 하나인 산문.
이칭
이칭
사굴산문(闍堀山門)
약칭
굴산문(崛山門)
단체
설립 시기
851년(문성왕 13)
설립자
통효대사(通曉大師) 범일(梵日)
설립지
굴산사
소재지
강릉
내용 요약

사굴산파(闍崛山派)는 통일신라 문성왕 때 선승 범일(梵日)이 강릉의 굴산사(崛山寺)에서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키면서 형성된 산문이다. 사굴산문, 혹은 굴산문 등으로도 부른다. 소위 구산문의 하나에 해당하며, 신라 말 성주산문(聖住山門)과 더불어 가장 번성했다. 고려시대에도 대표적인 산문의 위상을 유지했다. 특히 고려 후기 수선결사를 일으킨 지눌이 사굴산문 출신이다.

정의
신라 말에, 형성된 선문구산(禪門九山) 중 하나인 산문.
변천 및 현황

범일이 굴산사에서 사굴산파를 개창한 이후 강릉을 중심으로 한 강원도 지역에 사굴산파의 영향력이 확대되었다. 범일의 법맥을 이은 대표적인 제자로 낭원대사 개청(朗圓大師 開淸, 834~930), 낭공대사 행적(朗空大師 行寂, 832~916) 등 10명을 꼽고 있는데, 이들을 중심으로 신라 말, 고려 초 사굴산파의 법맥이 이어져 나갔다. 행적과 개청 등의 활동으로 사굴산문의 영향력은 지역적으로도 확대되어 갔으며, 지방 세력뿐만 아니라 국왕과 중앙 지배층의 후원도 받았다.

범일 입적 후 범일비 건립을 주도한 제자가 개청으로, 그는 굴산사에 계속 머물다 명주 지장선원(知藏禪院), 즉 보현사(普賢寺)로 옮겨가 930년 보현사에서 입적했고, 940년 개청의 비석이 세워졌다. 행적은 범일에게서 출가한 후 당나라 유학을 떠났으나, 귀국한 후 다시 범일을 찾아왔으며, 범일이 병이 들자 굴산사로 돌아와 범일의 곁에 있었다. 그는 주2에 건자난야(建子蘭若)를 세우고 문도를 양성했고, 명요부인(明瑤夫人)의 요청으로 울산 석남산사(石南山寺)에 머물다 916년 입적했고, 954년(광종 5) 태자사(太子寺)에 비석이 세워졌다. 이 외에도 여철(如哲), 양경(讓景), 윤정(允正), 석초(釋超) 등이 활동하였다.

사굴산파는 고려 중기에도 주요 산문으로서의 위상을 지켜나갔다. 혜소국사(慧炤國師) 담진(曇眞)은 송에 유학가 주4을 배워 왔고, 그의 제자인 대감국사(大鑑國師) 탄연(坦然)은 송나라 임제 승려와 편지를 통해 활발히 교류하였다. 이들은 예종과 인종대 왕사국사에 책봉되며 불교계를 이끌었다. 예종의 아들인 대선사 지인(之印)이 담진에게 출가하여 사굴산파에 속하였고, 탄연은 이자현(李資玄) 등에게 『능엄경(楞嚴經)』을 강의하며 새로운 선풍을 전했다. 담진의 주5인 조응(祖應) 등은 용문사(龍門寺)주6하고 담선법회(談禪法會)를 열기도 하는 등 12세기 사굴산파는 크게 부흥하였다.

무신정권기 사굴산파를 주도하던 담진계가 위축되는 대신, 사굴산파 안에서는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이 당시 불교계를 비판하며 새롭게 수선결사를 개창하였다. 수선사는 개창 초기에는 사굴산파에 대한 계승 인식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지만, 4세 사주인 혼원(混元) 이후가 되면 사굴산파의 계승을 표방하기 시작하는데, 특히 6세 사주인 충지(冲止)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14세기에 공민왕대에는 수선사 13세인 각진국사 복구(覺眞國師 復丘)가 왕사에 책봉되었다. 또한 고려 말 불교계를 이끌며 공민왕대 왕사에 책봉된 나옹혜근(懶翁惠勤)이나 우왕대 국사가 되었던 환암혼수(幻庵混脩) 등도 사굴산파 출신이었다.

의의 및 평가

신라 말 범일이 굴산사에 주석하며 산문을 개창한 이래 사굴산파에서 배출된 승려들은 다양한 주7을 수용 및 발전시켰고, 이 과정에서 사굴산파는 한국 선종의 주된 흐름을 형성하였다. 사굴산파의 영향력은 조선시대에도 이어졌다.

참고문헌

원전

『조당집(祖堂集)』 17
『한국선종약사』(권상로, 불교학논문집, 1959)
『선종구산내력』(김영수, 1937)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조선총독부, 1919)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이능화, 신문관, 1918)

단행본

논문

김상영, 「高麗時代 禪門 硏究」 (동국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7)
정동락, 「崛山門 梵日國師 관련 자료의 검토」(『한국고대사탐구』 33,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019)
조영록, 「崛山祖師 梵日 新傳」(『한국사상사학보』 33, 한국사상사학회, 2016)
한기문, 「新羅末 禪宗 寺院의 形成과 構造」 (『한국선학』 2, 한국선학회, 2001)
황인규, 「고려전기 闍崛山門系 고승과 禪宗界」 (『한국선학』 17, 한국선학회, 2007)

인터넷 자료

기타 자료

주석
주1

고승(高僧)의 사리를 안치한 탑. 우리말샘

주2

평안북도 삭주군에 있는 면. 쌀, 콩, 담배 따위의 농산물과 축산ㆍ공산ㆍ광산물의 집산지이다. 군청 소재지이다. 우리말샘

주4

임제종에서 하는 선법(禪法). 우리말샘

주5

제자의 제자. 우리말샘

주6

낡은 건물을 헐거나 고쳐서 다시 지음. 우리말샘

주7

신선과 같은 기질이나 풍채. 우리말샘

주8

폐하여져 승려가 없는 절. 우리말샘

관련 미디어 (3)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