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 1책의 석판본이다. 1691년(숙종 17)경 처음 간행되었고, 1959년 후손 치범(治範) · 문범(文範) 등이 중간하였다. 권두에 남구만(南九萬)의 초간본 서문과 유영선(柳永善)의 중간본 서문이 있으며, 권말에 후손 사범(思範)의 발문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과 연세대학교 학술문화처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판본은 한국문집총간, 한국역대문집총서에 수록되어 영인되었다.
본집은 크게 시(詩) 102제(題), 부(賦) 23편, 문(文) 32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는 오언절구 4제 4수, 칠언절구 28제 34수, 오언율시 9제 10수, 오언배율 47제 48수, 칠언고시 14제 14수이다. 시제가 실제(失題) 또는 실기제(失其題)라고 되어 있는 것이 5수, 누구를 애도하기 위해 지은 것인지 알 수 없는 만시(挽詩)가 3수, 과제(課製)가 6수이다. 주로 생활을 소재로 한 것이 다수이며, 이식(李植), 이경석(李景奭) 등에게 보내는 시도 있어 그의 교유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부는 대부분 창작 연도와 배경이 제목 아래 주석으로 부기되어 있다. 그 중 「태청사(泰淸辭)」는 저자의 동생인 신해익(愼海翊)이 천문(天門)에서 노니는 꿈을 꿔 지은 것인데, 본집에는 제목만 있고 본집에 부기된 「호산행록(湖山行錄)」에 수록되어 있다. 「천문사(天門辭)」는 1611년(광해군 3) 조찬한(趙纘韓)이 파직되었을 때 지은 것이다. 「칠회부(七懷賦)」 7수 연작은 광해조의 난정(亂政)을 개탄하는 내용이며, 「장귀사(將歸辭)」는 인목대비 폐위에 강개하여 지은 것이다.
문은 제문(祭文), 명(銘), 잠(箴), 설(說), 소(疏) 및 묘도문자(墓道文字) 등이 있다. 「제오참판문(祭吳參判文)」은 저자가 지제교(知製敎)로 재직 시 지은 오백령(吳百齡)의 사제문(賜祭文)이다. 「제현주조선생문(祭玄洲趙先生文)」은 저자의 스승 조찬한이 세상을 떠난 지 1주기를 맞이하여 지은 제문이다. 「망제찬(亡弟贊)」, 「억제원(憶弟怨)」은 제목만 남아 있고 본문은 본집의 부집(附集) 「호상행록」에 실려 있다. 「희화찬천자사오당작(戲和寒泉子四吾堂作)」은 면천(沔川)에 있는 이후기(李厚基)의 사오당(四吾堂)에 써 준 글이다. 권필(權韠)과 이호민(李好閔) 등이 사오당에 써 준 명(銘)이 남아 있는데, 이들의 글을 보고 지은 듯하다. 「희제김주부화첩(戲題金主簿畫帖)」은 소 그림으로 유명한 문인화가 김식(金埴)의 화첩에 써 준 글이다. 「연촌화상찬(烟村畫像贊)」은 문종조(文宗朝)에 직제학을 지낸 동향 출신의 최덕지(崔德之)의 화상에 쓴 글이다. 명(銘), 잠(箴), 살(說)은 대개 과제(課製)이다. 「상소(上疏)」는 저자 58세 때 올린 글이다. 정심(正心)이 치국(治國)의 근본임을 논하고 아울러 병을 이유로 체직을 청하는 내용이다. 「현주집발(玄洲集跋)」은 조찬한의 생평과 그의 유고를 정리하여 문집으로 편차한 경위를 서술한 글이다. 「삼휴집발(三休集跋)」은 조찬한의 아들 조휴(趙休)의 생평과 문집 편찬 경위를 서술한 글인데 간본 「삼휴당유고(三休堂遺稿)」에 발문으로 실려 있다. 이어서 수록된 「기자성삼서(寄子聖三書)」, 「잡록(雜錄)」, 「기몽(記夢)」 및 아우 신해익의 묘지명 2편 역시 제목만 남아 있고 본문은 「호산행록」에 실려 있다. 묘도문자로 비음지(碑陰識) 2편, 비명(碑銘) 3편, 묘갈명(墓碣銘) 2편이 실려 있는데 친척과 동향 사람을 위해 지은 것이 대부분이다. 영암(靈巖) 출신의 최정(崔珽), 나주(羅州) 출신의 양만용(梁曼容), 영광(靈光) 출신의 신응망(辛應望), 저자의 동갑내기 벗 송흥길(宋興吉), 저자의 처조부 유춘발(柳春發), 아우 신해익의 장인 유현남(柳賢男) 등에 대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