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병지에 따르면, 973년(광종 24)에 안융진이 축성되었다고 하였고, 『고려사』 지리지에는 974년(광종 25)에 축성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통상적으로 안융진은 973년에 축성이 시작되어 974년(광종 25)에 완료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후 1033년(덕종 2)과 1137년(인종 15)에 다시 축성되었다.
『고려사』 병지 성보조(城堡條)에 기록된 안융진 성곽의 규모는 349칸이다. 문은 4개소가 있었고 수구(水口), 성두(城頭), 차성(遮城)이 각기 1개소가 있었다. 주현군조(州縣軍條)에 따르면 안융진에는 진장(鎭將) 1인, 낭장(郎將) 1인, 별장(別將) 2인, 교위(校尉) 4인, 대정(隊正) 8인, 행군(行軍) 206인, 정용(精勇) 2대, 좌군(左軍) 3대, 보창(保昌) 1대, 신기(神騎) 11인, 보반(步班) 27인, 백정(白丁) 33대의 주진군(州鎭軍)이 편성되었다.
고려 북계(北界)의 지리적 요충지에 위치한 안융진은 993년(성종 12) 윤10월에 거란의 제1차 침입 시기에 거란의 도통(都統) 소손녕(蕭遜寧)이 이끄는 거란군의 공격을 받았다. 고려 북계의 봉산군(蓬山郡)을 함락시킨 소손녕은 강화 회담이 지연되자 다시 안융진을 공격하였다.
이 때 중랑장(中郞將) 대도수(大道秀)와 낭장 유방(庾方)의 활약으로 고려는 안융진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소손녕은 다시 진군하지 못하고 사람을 보내 고려가 항복할 것을 재촉하였다. 이를 계기로 서희(徐熙)와 소손녕의 외교 담판이 열렸고 고려는 강동 6주(江東六州)를 확보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