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5년(광해군 7) 진사로서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승문원에 들어가 박사가 되었으나, 대북파에 의해 파직되어 아버지 이현영과 함께 수원 쌍부촌(雙阜村)에서 은거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형조좌랑이 되었다가 뒤이어 정언이 되었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 때는 한남도원수(漢南都元帥)의 종사관(從事官)으로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 뒤 지평 · 헌납 · 수찬 · 교리 · 이조좌랑 · 응교 · 좌부승지 등의 청요직(淸要職)을 여러 차례 역임하고 병조참의 · 공주목사 · 호조참의를 거쳤다.
1635년(인조 13)에는 경상도관찰사로 나가 많은 치적을 쌓아 송덕비가 세워졌다. 1636년 안변부사로 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평안도찬획사(平安道贊劃使)로서 적과 싸우기를 원했으나 감사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그러자 죽도(竹島)에 영을 설치하고 백성들을 피란시켜 적봉(賊鋒)을 피하게 했다.
이후 도승지에 이어 대사간, 이조참의 · 참판을 역임했다. 1645년 부제학으로 동지 겸 정조성절사(冬至兼正朝聖節使)로 청나라에 가서 지나친 세공미(歲貢米)의 부담을 줄이는 데 성공하였다. 효종이 즉위하자 호조판서에 올랐으나, 대동법 및 행전(行錢) 등의 문제로 김육(金堉)과 뜻을 달리해 대립하였다.
1650년(효종 1) 효종이 성지(城池)를 수축하기 위해, 왜정(倭情)이 염려된다는 이유로 청나라에 보내는 주문(奏文)에 남방의 성곽 수축과 군사 훈련을 주장했다. 그러자 청나라가 이를 강화조약 위반이라고 추궁하고, 그 책임으로 이경석(李景奭) · 조경(趙絅) 등이 청사(淸使)의 사문(査問)을 받았다. 이때 이들을 적극 변호해 구원하여 효종의 총애를 받았다.
그 해 진주부사(陳奏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우참찬이 되었다. 이어 예조판서가 되었으나, 종묘 수리에 태만했다는 김육 등의 탄핵으로 함경감사로 밀려났다가 병으로 사퇴하였다. 1653년 공조판서에 임명되어 돌아오던 중 김화에서 병사하였다.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