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태지(泰之), 호는 초려(草廬). 아버지는 유학 이서(李曙)이다.
김집(金集)의 천거로 1634년(인조 12) 희릉참봉(禧陵參奉)이 되고 이어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 · 대군사부에 임명되었지만 나가지 않았다.
1658년(효종 9) 송시열(宋時烈) · 송준길(宋浚吉)의 천거로 지평이 되고, 이듬해 시강원진선 · 집의를 거쳐 현종 즉위 후 공조참의 · 동부승지를 역임하였다.
1660년(현종 1) 복제시비 때 호군으로 있으면서 송시열의 기년설(朞年說)을 옹호하였다. 뒤이어 효종 말년 이래 적어두었던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시폐(時弊)를 논하고 구민(救民) · 구국(救國)의 대책을 제시, 왕이 비변사로 하여금 검토하게 했으나 제대로 채택되지 않자 실망해 사직, 귀향하였다. 그 뒤에도 이조참의 · 동부승지 · 우부승지 · 이조참판 등이 제수되었지만 취임하지 않았다.
1674년의 갑인예송(甲寅禮訟) 때 복제를 잘못 정했다는 남인 윤휴(尹鑴) 등의 탄핵을 받아 다음 해 영변에 유배되었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으로 죄가 풀려 호군에 서용되었으나 숙종 초부터 사이가 벌어진 송시열과 그 계통 사람들의 미움을 받아 유현(儒賢)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한 채 불만 끝에 죽었다.
예학(禮學)에 뛰어나 김집과 함께 『상례비요(喪禮備要)』 · 『의례문해(疑禮問解)』 등을 교감(校勘)했으며, 특히 치국경제(治國經濟)의 문제에서는 이이(李珥)를 모범으로 삼아 점진적인 경장론을 전개하였다.
즉, 우선 당시 민폐와 국정 동요의 근본 요인이 농민의 유리와 토지의 황폐에 있다고 보고 안정책으로 향약에 의한 향촌조직과 오가작통제(五家作統制)의 실시, 양전(量田) 시행과 사창(社倉) 설치를 주장하고, 양인(良人) 이상 자제의 취학과 15세 이후 능력에 따른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선택을 역설하였다.
구체적인 변통책으로서는 어염세(魚鹽稅)의 국고 전환과 면세전의 폐지, 내수사의 혁파, 부세(賦稅) 및 인역제(人役制)의 개혁, 공안(貢案)의 조정과 감축, 양전제의 개선, 관제의 개편과 합리적 운영방안 등을 제시하였다.
본래 한미한 출신으로서 처음에는 민재문(閔在汶)에게 배우다가 김장생(金長生) · 김집 부자를 사사, 그 문하의 송시열 · 송준길 · 윤선거(尹宣擧) · 유계(兪棨)와 더불어 호서산림 오현(五賢)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다.
소론에 의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문인들이 고향에 금산서원(錦山書院)을 세워 제향했다가 1713년 노론 때문에 일시 훼철되기도 하였다. 저서로 『초려집』 26권이 전한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