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삼 ()

인삼
인삼
식물
동식물
두릅나무과에 속하는 다년생 초본(草本: 꽃이나 풀 등)식물.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인삼은 두릅나무과에 속하는 다년생 초본식물이다. 북위 30°∼48°에 이르는 지역에 자생하며, 우리나라와 중국의 만주, 소련의 연해주 지역이 주요 자생지이다. 우리나라는 인삼산지로서 가장 적합한 천연적 조건을 갖추고 있고, 희귀한 산삼 대신 재배·가공 기술을 개발하여 인삼의 주 생산국 지위를 누려왔다. 동양권에서는 ‘고려인삼’으로, 서양권에서는 ‘Korean ginseng’으로 불리며 최상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1950년대 이후 성분·약리작용 및 임상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획기적인 결과가 나와 수천 년 동안의 신비가 과학적으로 해명되어 가고 있는 중이다.

정의
두릅나무과에 속하는 다년생 초본(草本: 꽃이나 풀 등)식물.
개설

학명은 ginseng C. A. Meyer이다. 깊은 산악지대에서 자라는 식물로 흔히 재배하고 있다. 높이는 60㎝에 달하고, 근경(根莖: 뿌리와 줄기)은 짧으며 곧거나 비스듬히 서고, 밑에서 도라지같은 뿌리가 발달한다. 근경 끝에서 1개의 원줄기가 나오고 끝에서 3, 4개의 잎이 윤생(輪生:돌려나기)하며 긴 엽병 끝에 5개의 장상복엽(掌狀複葉: 손바닥 모양의 겹잎)이 달린다.

소엽은 난형(卵形: 계란형) 또는 도란형(倒卵形: 계란을 거꾸로 세운 형태)이고 끝이 뾰족하며 밑부분이 좁고, 표면 맥 위에 잔털이 약간 있으며 가장자리에 잔톱니가 있다. 꽃은 연한 녹색으로 4월에 피며, 열매는 둥글고 적색으로 익는다. 뿌리는 옛날부터 강장제 또는 만병통치약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최근의 과학적 연구에 의해서도 약효가 인정되어가고 있다.

인삼으로 불리는 다른 나라의 약초와 구별하기 위하여 우리나라의 인삼을 고려인삼이라 하고 ‘蔘’으로 쓰며 외국삼은 ‘參’으로 쓴다. 따라서, 화기삼(花旗參) · 동양삼(東洋參) · 관동삼(關東參) 등은 외국삼을 일컫는 말이다. 수천년 동안 신약영초(新藥靈草)로 계승되어 내려온 우리 나라 인삼을 고려인삼, 일본에서는 ‘조선인삼’, 서양에서는 ‘Korean ginseng’이라 부르는데, 모두 ‘고려’ · ‘조선’ · ‘Korea’ 등을 인삼에 붙이고 있다.

북위 30°∼48°에 이르는 지역에 자생하며, 자생지로는 우리나라(33.7°∼43.21°), 중국의 만주(43°∼47°), 소련의 연해주(沿海州, 40°∼48°) 등 3개 지역이라고 되어 있다.

산삼(山蔘)이라고 불리는 자연삼의 산출은 현재 아주 희소하기 때문에 인삼산지로서 가장 적합한 천연적 조건을 갖추고 재배 및 가공법의 기술을 개발, 계승하여온 우리 나라가 인삼의 주 산국으로 되어왔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시대의 영토는 한때 요동(遼東) 및 남부 만주와 연해주에까지 뻗어 있었으므로, 고려인삼은 지구상에서 고구려 판도 안에서만 생산되었다고 할 수 있어, 오늘날 우리 나라 인삼을 고려인삼이라고 부르는 것은 타당하다.

미국인삼은 광동인삼 · 화기삼 · 아메리카인삼 · 서양인삼 · 양삼(洋參) · 포삼(泡參) 등으로 불리며, 원식물이 Panax quinquefolium LINNE이고 일본의 죽절인삼(竹節人參)은 Panax japonicum C. A. MEYER이며, 중국의 삼칠인삼(三七人參)은 Panax notoginseng(BURK) F. H. CHEN이어서 같은 두릅나무과에 속하나 우리 나라의 인삼과는 원식물이 다르다.

요즈음 구미(歐美)에서 시베리아인삼(Siberian ginseng)이라고 하여 판매되고 있는 제품은 두릅나무과이지만 속(屬)이 인삼속(Panax)이 아닌 오갈피나무의 일종인 Eleutherococcus senticosus MAXIM이라는 목본식물(木本植物)의 뿌리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인삼이 산출되었고, 또 재배할 수 있다.

문헌 기록

고려인삼은 유사 이전부터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문헌에는 불과 1,500여년 전에야 나타나며 그나마도 중국문헌에 실려 있을 뿐이다.

양(梁)나라 때 도홍경(陶弘景)이 저술한 의학서적인 『신농본초경집주(神農本草經集注)』 및 『명의별록(名醫別錄)』에 백제 · 고려 · 상당(上黨)의 인삼에 관한 기록이 있다. 여기서 고려는 고구려이며, 고려인삼보다도 중국의 상당삼(上黨參)이 더 좋다고 하였다. 그러나 상당삼은 오늘날의 고증에 의하면 초롱꽃과에 속하는 만삼(蔓參)이며 인삼이 아니라고 한다.

『양서(梁書)』 본기(本紀)에도 무제시대(武帝時代)에 고구려 및 백제가 자주 인삼을 조공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수(隋)의 『한원(翰苑)』 중의 「고려기(高麗記)」에 마다산(馬多山:蓋馬大山인 것으로 추측된다)에 인삼이 많이 산출된다는 기록이 있고, 진(陳)의 사문(沙門) 관정(灌頂)이 편찬한 『국정백록(國定百錄)』에도 고려에서 미역[昆布]과 인삼을 보내왔다는 기록이 올라 있다.

1123년(인종 1)에 중국의 송나라 사람 서긍(徐兢)이 고려를 다녀가서 저술한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가운데도 고려인삼에 관한 기록이 나오는데, 주목할만한 사실은 당시에 이미 홍삼(紅蔘)이 있었다는 것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즉, 백삼(白蔘)이 좋기는 좋은데 여름을 지내면 좀이 먹기 때문에 솥에 쪄야 보존성이 있다는 것이다. 개성삼(開城蔘)은 대략 백삼 · 홍삼의 두 가지로 나뉘는데, 백삼은 흙에서 캔 삼을 그대로 말린 것이며, 홍삼은 그것을 가마에 넣고 쪄서 붉은 빛이 나게 한 것이다.

우리나라 문헌으로는 『삼국사기』 또는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에 올라 있는 인삼기록이 가장 오래 된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 성덕왕 · 소성왕 · 경문왕조에 보면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할 때 공헌(貢獻)한 기록이 나오는데, 특히 799년(소성왕 1) 7월에는 “길이가 9척이나 되는 인삼을 발견하여 하도 신기하여서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진상을 하였더니 덕종이 보고 인삼이 아니라며 받지 않았다.”라는 기록이 있어 매우 흥미롭다.

신라에서 당나라에 조공한 인삼에 관해서는 당나라 숙종 때에 이순(李珣)이 저술한 『해약본초(海藥本草)』 가운데 인삼을 붉은 실로 묶어 포장하였다는 대목이 있어, 그때에도 외국에 보내는 인삼의 상품가치를 높이기 위한 가공기술이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정확한 간행연대는 분명하지 않지만, 고려 고종 때에 대장도감(大藏都監)에서 초판을 간행한 『향약구급방』은 우리 나라에서 간행된 가장 오래된 의학서적으로 현존하고 있다. 초간본은 전하지 않고 1417년(태종 17)에 중간된 것이 그나마도 일본 궁내성 도서료(宮內省圖書寮)에 1부가 소장되어 있을 뿐인데, 그 중 「방중향약목(方中鄕藥目)」에 인삼이 170여 종의 향약(우리 나라에서 나는 약재를 중국 약재에 대하여 이르는 말)의 하나로 올라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내용 중 인삼의 삼자가 ‘參’이 아니고 ‘蔘’으로 되어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인삼을 ‘人參’으로 쓴다. 우리는 조선왕조의 문헌에서 ‘參’자 대신 ‘蔘’자를 썼으며, 『조선왕조실록』 등에서 ‘입참(入參)’ · ‘참알(參謁)’ · ‘참치(參差)’ 등의 용어에서 ‘參’자를 사용하고 있어 인삼과 혼동될 우려가 있어, 아예 ‘人蔘’으로 표기하든가 ‘參’자의 속자(俗字)인 ‘叅’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중국에서도 인삼을 ‘人蔘’으로 표시한 전례가 없는 것은 아니며, 위(魏)나라의 장읍(張揖)이 쓴 『광아(廣雅)』에 ‘葠地精人蔘也’라는 문구가 나온다.

인삼의 우리나라 고유의 고명(古名)은 ‘심’이지만, 어원 및 시작된 연대는 알 수 없다. 『동의보감』이나 『제중신편(濟衆新編)』 · 『방약합편(方藥合編)』에 인삼의 향명(鄕名)이 ‘심’이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면, 근세까지도 ‘심’을 사용하여 왔음을 알 수 있으나, 현재는 겨우 산삼채취인의 은어인 심마니에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함경남도지방의 산삼채취인들은 인삼을 ‘방추’ 또는 ‘방초’라고 하는데 어원은 방초(芳草)일 것이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인삼을 ‘귀개(鬼蓋)’ · ‘인함(人銜)’ · ‘신초(神草)’ · ‘토정(土精)’ · ‘옥정(玉精)’ · ‘혈삼(血參)’ · ‘인미(人微)’ · ‘황삼(黃參)’ · ‘추면환단(雛面還丹)’ · ‘인신(人身)’ · ‘활인초(活人草)’ · ‘지정(地精)’ · ‘해유(海腴)’ 등 많은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인삼속(人蔘屬)을 나타내는 Panax의 어원은 Pan(모든, 汎)+acos(醫藥, axos)이며, 따라서 만병통치약이라는 뜻이다. 또한 schinseng은 신삼(神蔘)의 중국음에서 유래한다. ‘schinseng’ 대신에 ‘ginseng’도 사용되는데, 이것은 인삼의 중국음이다. 인삼은 옛날 중국에서 ‘人蓡’ 또는 ‘人葠’ 등으로도 표시되었다.

일본은 원래 자생인삼(自生人蔘)이 전혀 없었으며, 백제의 의박사(醫博士)인 나솔왕유릉타(奈率王有㥄陀), 채약사(採藥師)인 시덕번량풍(施德潘量豊) · 고덕정유타(固德丁有陀)가 일본왕의 초빙으로 554년에 일본에 건너갔을 때 우리의 인삼도 소개되지 않았나 추측되지만 단정할 수는 없다. 742년 발해의 문왕이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인삼 30근을 선물하였다는 기록이 일본에서의 인삼 도입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일본에서 점차 인삼의 중요성을 인정하여 국내생산을 원하여 1727∼1728년경에 우리 나라에서 생근(生根)과 종자를 얻어 재배를 시험한 것이 일본에서의 인삼 재배의 시초라고 한다. 인삼의 식물학적 특성의 하나는 재배지에 대한 선택성이 강하여 기후나 토질 등의 자연환경이 적당하지 않은 곳에서는 적응시켜서 생육시키는 것이 아주 곤란하다는 점이다. 설령 생육된다 하더라도 생산된 인삼의 형태 · 품질 · 약효에 현저한 차이가 있다.

현재 일본이나 미국 등지에서도 인삼이 재배되나 우리의 인삼을 따를 수 없어, 이런 점에서도 우리나라가 인삼 생산의 최적지라고 인정되어 인삼 종주국으로서의 전통을 지키고 있다.

약효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본초학서(本草學書)인 『신농본초경』에서는 365종의 약물을 상중하의 3품으로 분류하여, 상품 약 120종, 중품 약 120종, 하품 약 125종으로 구별하였다. 인삼은 상품약에 들어 있으며, 인삼의 약효에 대해서 “오장을 보호하고, 정신을 안정시키며 눈을 밝게 하고, 오래 복용하면 몸이 가벼워지고 오래 살 수 있다.”는 등의 표현을 하고 있어, 오늘날의 과학으로 밝혀진 인삼의 효능과 잘 부합된다.

후한(後漢) 헌제(獻帝) 건안 연간(建安年間)의 저작이라고 인정되는 장중경(張仲景)의 『상한론(傷寒論)』에 처음으로 인삼의 구체적인 처방이 21방(총 113방)이 나오고 있으니, 이것이 최초의 인삼 의약기록이다. 우리 나라에서 오늘날도 흔히 사용되고 있는 한방처방서인 『방약합편』에 올라 있는 467방의 처방은 상중하의 3통분류(三統分類)로 나누어져 있다.

상통처방은 ‘보제(補劑)’, 중통처방은 ‘화제(和劑)’, 하통처방은 ‘공제(功劑)’이며, 인삼이 배합되어 있는 132종 처방의 약 94%가 상통과 중통에 들어 있음으로 보아, 인삼은 보약 또는 강장제로 사용되는 것이지 특정 질병에 대한 치료약으로 사용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한방에서 인정되는 인삼의 약효를 요약하면, 강장 · 강심 · 건위보정(健胃補精) · 진정약으로 널리 상용되고, 위장기능 쇠약에 의한 신진대사기능의 저하에 진흥약(振興藥)으로 사용되며, 병약자의 위부정체감(胃部停滯感) · 소화불량 · 구토 · 흉통(胸痛) · 이완성하리(弛緩性下痢) · 식욕부진 등에도 응용된다.

이와 같은 약효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는 비교적 늦어 1950년대에 이르러서야 급속하게 발전되기 시작하였다. 성분 · 약리작용 및 임상적인 연구에 있어서 획기적인 결과가 많이 나와서 수천 년 동안의 신비가 과학적으로 해명되기 시작하는 동시에, 인삼이 결코 동양인의 신앙에 의해서만 계승되어 온 것이 아님이 입증되어 가고 있다. 또한 인삼의 과학적인 연구에 있어 우리 나라의 약학자 또는 의학자의 공헌이 크다는 것이 국제적으로도 인정되고 있어 인삼종주국으로서의 권위를 과시하고 있다.

인삼약효의 주성분이라고 현재까지 알려져 있는 사포닌 배당체(配糖體) 물질은 항피로작용(抗疲勞作用) · 작업능력증진작용 · 성선(性腺: 생식샘)의 발육촉진작용 · 혈당치 강하작용 등을 함이 증명되고 있다. 특히 주목할만한 사실은 인삼의 기본적 약리작용을 ‘적응소효과(adaptogen효과)’로 대표시키려는 학설이 유력하다는 사실이다.

‘생체가 가지고 있는 비특이적(非特異的)인 저항력을 증대시켜 줌으로써 병적인 상태를 정상화시켜 주는 작용’이 그 개념이며, 인삼의 만병통치약으로서의 효과를 잘 설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부신피질호르몬의 하나인 글루코코르티코이드(glucocorticoid)의 분비를 촉진시키며, 각종 스트레스에 대한 부신피질 기능의 강화에 유효한 것이 그와 같은 정상화작용의 뒷받침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

또, 대뇌피질을 자극하여 콜린작동성(choline 作動性)을 증강하여 혈압강하, 호흡촉진, 실험적 과혈당(過血糖)의 억제, 인슐린작용 증강, 적혈구 수 및 헤모글로빈의 증가, 소화관운동 항진 등의 작용이 있음이 알려지고 있다. 그 밖에 생체단백질 및 DNA(deoxy ribonucleic acid)합성촉진작용 · 항암작용 등이 있음이 연구되기 시작함으로써 장생불로약으로서의 인삼의 신비가 점차 과학화되는 추세에 있다.

재배 역사

이시진(李時珍)의 『본초강목(本草綱目)』의 인삼 해설 가운데 상당삼에 관한 내용과 조선에서의 인삼재배 및 거래에 관한 것을 기록한 것으로 보아, 『본초강목』의 집필이 시작된 1552년 당시에는 이미 우리 나라에서 인삼재배가 본격적으로 실시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증보문헌비고』라든가 『중경지(中京志)』 등에 인삼재배의 기원이 천수백 여년 전에 전라남도 동복(同福)에서 야생인삼종자를 채취하여 재배하기 시작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민간전승적 전설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에 확실하지 않다. 고려 고종시대(1214∼1260)에 인공적으로 산양삼(山養蔘)을 재배하였고, 경상북도 경주지방에서는 이미 1,200여년 전인 신라 소성왕 때에 재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연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의 모후산(母后山) 일대가 본격적인 재배인삼의 발상지이며, 이 동복삼(同福蔘)이 개성(開城) 상인들에 의하여 도입되어 개성이 드디어 인삼재배의 중심지가 되었다. 『정조실록』에 의하면 박유철(朴有哲)이 앞장을 서서 인삼의 일부재배(日覆栽培:햇빛을 가리고 재배함)를 기업적으로 실시하였다.

원래 인삼이라고 하면 야생인삼을 말하였으나, 점차 인삼의 수요가 크게 늘어남에 따라 야생인 천연삼의 채취만으로는 수요를 충족할 수 없게 된 것이 인삼재배기술의 개발을 촉구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미 고려 말엽에 인삼이 부족하게 되었으며, 중국의 요구와 우리의 왕실용을 위한 주구(誅求:관청에서 강제로 빼앗음)가 혹심하게 되자 할당량의 조변(調辨:조달)이 어려운 지방민들이 도망쳐 고향을 떠나는 사태마저 생겼다.

이미 중국은 남획으로 야생인삼이 거의 전멸 지경에 이르렀으나 우리 나라 공물의 덕택으로 수요를 충족시켜 왔는데, 이와 같은 수량을 공급하여야 할 우리 나라는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인삼을 확보하여야 할 필요성에 쫓기어 백성들에게 이른바 삼폐(蔘弊)를 주게 되었다. 삼폐를 견디지 못한 백성들이 어쩔 수 없이 인삼의 재배기술을 개발하게 된 것이, 오히려 현재에 이르러서는 전화위복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우리 민족의 뛰어난 인삼재배기술은 우리 국토의 천혜적인 입지조건과 결부되어 드디어 인삼으로 세계에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인삼의 재배에 필요한 자연조건은 다음과 같다.

① 기온:평균기온은 연간 9°∼13.8°C이고, 여름에는 20°∼25°C이며, 35°C가 넘으면 생리적 장애가 생긴다. ② 강우량:연간 700∼2,000㎜이나 적당량은 1,100∼1,300㎜이며, 강설량은 비교적 적은 곳이 좋다. ③ 일조량:인삼은 반양반음(半陽半陰)을 좋아하는 음지성 식물로서 직사광선은 좋지 않으며, 산란광(散亂光)으로서 옥외광선의 8분의 1 내지 13분의 1 정도가 알맞다.

④ 토양:유효태(有效態) 칼륨분이 풍부한 곳이 좋으며, 표토(表土)는 사양토(砂壤土), 심토(深土)는 점토가 좋다. 적당한 pH는 5.5∼6.0이고 오염되지 않은 숙전(熟田)이 좋다. ⑤ 지세:북쪽 또는 동북쪽으로 8°∼15°정도 경사진 곳이 좋으며, 평탄지라도 배수가 잘 되면 무방하다.

⑥ 거름:야생인삼의 자연환경과 유사하게 활엽수의 부식질이 많은 곳이 좋으며, 인공적으로라도 그렇게 만들어 주는 것이 좋다. 화학비료 또는 속효성의 농후한 비료를 많이 시용(施用)하여 자연적인 조건과 다르게 되면 인삼재배지로 부적당하다.

우리 나라의 현재의 인삼재배 분포는 남한에 있어서는 주로 경기도와 충청남도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고, 경상남도 · 전라남도 및 제주도를 제외한 각 도에 분포되어 있다. 각 도별 산지는 경기도 강화 · 김포 · 포천 · 이천 · 연천 · 파주 · 고양 · 여주 · 부천 · 용인 · 광주 · 화성, 충청남도의 금산 · 부여 · 논산 · 청양 · 홍성 · 대덕 · 공주 · 서산, 충청북도의 괴산 · 청원 · 음성 · 진천 · 보은 · 중원 · 제천 · 단양, 전북특별자치도의 진안 · 완주 · 무주 등지이다.

우리나라는 자연적 천혜조건으로 어디에서나 인삼재배가 가능하나, 정부에서 특히 홍삼원료포에 대해서는 특별경작구역을 지정하여 지정경작구역 내에 한하여 계획생산을 하고 있으므로, 자연입지에 대한 분포가 제한되고 있다.

이와 같이, 인삼재배 분포는 야생천연삼(재배인삼이 생산되기 시작한 뒤부터는 산삼이라고 한다)의 분포와는 달리 정책적 · 경제적인 요구에 따라 조정되고 있다. 1998년 6월 말 통계에 의하면 인삼경작 실적이 홍삼포는 2,902㏊, 백삼포는 7,447㏊로 모두 1만 349㏊에 이른다.

정치와 경제에 미친 영향

동양

약 2,000년 전부터 우리나라가 인삼의 주산국으로 알려짐으로써 인접 국가들과 정치적 및 경제적으로 인삼을 둘러싼 관계가 성립되어 왔으며, 따라서 고려인삼을 매체로 하여 정치적 및 경제적 국제관계가 촉진되어 왔다. 국내에 있어서는 인삼의 공과부담(貢課負擔), 채굴 및 제조 또는 수출교역 등의 통제에 수반되는 각종 부정으로 말미암아 인삼 때문에 생긴 삼폐와 악정(惡政)의 역사가 많았다.

국제관계는 이미 삼국시대부터 우리나라가 산삼향(産蔘鄕)으로 알려져 중국대륙의 여러 나라 또는 일본에 공헌품 및 예단물(禮單物)로 큰 구실을 해왔고, 근세에 와서는 만주와의 국경지대에서 상호 월범채삼(越犯採蔘)으로 외교적인 분쟁이 야기된 사실(史實)이 많다.

인삼은 예로부터 국가경제에 영향을 주었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홍삼의 판매제도는 국가 전매로 되어 있다. 최근 인삼의 과학화 연구가 세계적으로 활발하게 진행되어 인삼의 탁월한 약효가 과학적으로 인정됨에 따라 인삼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이 높아져 가고 있다. 이런 때에 있어서 고려인삼의 종주국으로서의 전통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우리 학자에 의한 연구는 물론이고, 생산 및 교역을 진흥시키는 여러 가지 방도가 강구되어야 할 것이다.

최남선(崔南善)『조선상식문답(朝鮮常識問答)』의 인삼 해설에 의하면 옛날 우리 나라는 어디에나 자연생의 삼이 많아서 1년에 수만 근을 채취하여 그것을 주고 일본에서 은(銀)과 동(銅)을 사다가 그대로 중국에 팔아 이익을 얻었다. 또 인삼을 주고 중국에서 생사와 주단을 사다가 그대로 일본에 팔아 또 이익을 얻는 국제무역을 행하여 수백 년 동안의 국제수지는 거의 인삼이 지탱하여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런데 남채(濫採) · 남용(濫用)의 결과 영조 때에는 자연삼이 부족해져서 전라도와 경상도지방에서부터 씨를 뿌려 인공으로 기르는 법이 행하여지고, 나중에 개성에서 이를 시험하여 가장 좋은 성적을 내었으므로 그때부터 개성이 인삼의 대표적 산지로 되었다는 것이다.

서양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수천 년 동안 인삼이 영약(靈藥)으로 숭상되어 왔으나 서양에 소개된 것은 불과 수세기에 지나지 않는다. 원나라 때 중국을 여행한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나 오도리크(Odoric,P.da)의 견문기에는 아직 인삼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차세(Chasse,E.U.)에 의하면 1610년에 최초로 인삼이 네덜란드 사람에 의하여 유럽에 소개되었다고 한다. 1653년 난선(難船)으로 제주도에 표류하여 1666년까지 우리나라에 체재한 네덜란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인 하멜(Hamel,H.)이 저술한 『하멜표류기』 가운데 조선특산품으로서 인삼이 기록되어 있다. 또 그들이 우리 나라를 떠나 1667년 일본의 나가사키(長崎)에 들렀을 때, 그곳 관헌과 회견하며 인삼에 관한 문답을 한 것이 기록에 남아 있다.

일본 관헌이 “인삼을 어떻게 발견하며 무엇에 사용하며, 또 어디에 수출하는가?”라는 질문에 네덜란드 사람은 “인삼은 북부지방에서 발견되며, 그들에 의하여 약으로 사용되고, 또 매일 타타르(韃靼:지금의 중국 동북지구, 즉 만주이며 고구려시대에는 우리의 판도였다)에 공물로 보내며 상인에 의하여 중국과 일본에 수출된다.”고 대답하고 있다.

그러나 인삼의 생태 및 약효를 스스로 관찰하여 상세하게 보관한 기록은 예수회의 선교사로 중국에 파견되었다가 중국 황제의 명으로 타타르지방의 지도 작성에 종사하던 프랑스인 자르투(Jartoux,P.)가 1711년 4월 12일자로 본국에 보낸 서신에 적혀 있다. 이 보고가 계기가 되어 캐나다의 몬트리올을 중심으로 북미 동부지역에 인삼 호경기를 불러일으켜, 채취한 인삼을 중국에 수출하여 막대한 수입을 획득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피스(Griffis,W.E.)의 『Corea, The Hermit Nation』(1907)에 의하면, 1750년대에는 벌써 북경(北京)이나 광둥(廣東)에서 미국이 인삼을 둘러싸고 조선과 무역상의 경쟁국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와 같은 인연으로 미국이 조선과의 통상을 서두르게 되었고, 드디어 1882년 5월 22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조인하기에 이르렀다.

전문 14관(款)인 이 조약의 제8관에 미국인이라 하더라도 홍삼을 해외로 가지고 나갈 경우 처벌한다는 문구가 있는 것을 보더라도 한미간에 인삼이 중요한 문제였음을 알 수 있다.

그 이듬해 민영익(閔泳翊)을 전권대신으로 하는 11명의 특사단이 미국을 방문하였을 때 그리피스가 뉴욕에서 그들을 만났는데, “특제 인삼의 커다란 보따리를 내어 놓았다. 이 조용한 아침의 나라의 사람들로서, 인삼을 가지지 않고 외국에 나간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미 두 나라의 국교 개시에 있어서 인삼이 중요한 매체 구실을 한 것이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약학산고』(홍문화, 동명사,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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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삼』(고려인삼연구소, 1978)
『한국인삼심포지엄』(한국생약회, 1974)
『한국의학사』(김두종, 탐구당, 1966)
『朝鮮醫學史及疾病史』(三木榮, 富士精版印刷株式會社, 1963)
『人蔘史』(今村, 朝鮮總督府 專賣局,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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