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은 고려 전기 제17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1122~1146년이며, 예종의 장자로 이자겸 등에 의해 15세에 왕위에 올랐다. 국자감의 학제를 정비하고, 각 주현에 향약을 설립해 지방교육을 진작시켰으며, 서적소 설치를 통해 유학의 부흥에 힘썼다. 이자겸, 척준경 등의 모반을 진압하였다. 묘청·정지상·백수한 등이 주장한 서경길지설에 공감하여 한때 서경천도의 뜻을 품었다. 서경천도가 무산되면서 묘청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김부식을 서경정토원수로 삼아 평정하였다. 이후 김부식 등에게 관찬 사서인 『삼국사기』를 편찬하게 하였다.
재위 1122∼1146년. 이름은 왕해(王楷), 초명은 왕구(王構). 자는 인표(仁表). 예종(睿宗)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순덕왕후(順德王后) 이씨(李氏)이다. 비(妃)는 이자겸(李資謙)의 3녀·4녀인 폐비 이씨, 중서령(中書令) 임원후(任元厚)의 딸 공예왕후(恭睿王后), 병부상서 김선(金璿)의 딸 선평왕후(宣平王后)이다.
성품이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너그럽고 자비로웠다. 또, 학문을 좋아하고 스승과 벗에 대한 예가 밝았다. 1115년(예종 10) 태자로 책봉, 이자겸(李資謙) 등에 의해 1122년(인종 즉위년) 4월에 15세로 왕위에 올랐다.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인종 재위 때 식목도감(式目都監)에서 학식(學式)을 만들게 했는데, 국자학(國子學)은 3품 이상, 태학(太學)은 5품 이상, 사문학(四門學)은 7품 이상의 자손을 입학하게 하였다. 1126년(인종 4) 이자겸의 난이 일어나자, 최사전(崔思全)과 척준경(拓俊京)을 시켜 난을 진압하고, 이자겸을 잡아 영광으로 유배시켰다.
1126년(인종 4) 인종은 백관을 소집해 여진(금)에 대한 사대 문제를 논의했는데, 이자겸과 척준경의 주장을 받아들여 사대를 결정하였다.
1127년(인종 5) 척준경을 유배하고, 중외(中外)에 조서(詔書)를 발표해 각 지방의 주현에 향학을 세워 지방자제들의 교육을 진작시켰다. 1128년(인종 6) 묘청(妙淸)· 백수한(白壽翰)· 정지상(鄭知常) 등이 주장한 서경길지설(西京吉地說)에 공감해 서경의 임원역(林原驛)에 대화궐(大華闕)을 짓고 수시로 서경을 순행하였다.
1129년(인종 7) 서적소(書籍所)를 설치해 정치하는 여가에 여러 학사들과 학문을 탐구하고 서적을 강독하게 하였다. 1131년(인종 9) 서경의 대화궁에 팔성당(八聖堂)을 설치해 여러 부처와 명산의 신(神)을 제사하게 하였는데, 이에 서경천도론이 크게 일어났다. 1133년(인종 11) 무학재(武學齋)를 폐지함으로써 무예로 선비를 뽑는 일은 없어졌다.
1135년(인종 13) 묘청·정지상·백수한 등이 주1·금국정벌론[^2]·칭제건원론 등을 내세웠으나, 김부식(金富軾) 등에 의해 좌절되면서 묘청의 난이 일어났다. 이에 김부식을 서경정토원수(西京征討元帥)로 삼아 난을 평정하게 하였다.
묘청의 난을 진압한 후, 1135~1145년(인종 23) 사이에 김부식 등에게 명해 관찬사서인 『삼국사기』를 편찬하게 하였다. 이는 주3의 『사기(史記)』를 모방한 기전체(紀傳體)로 50권이나 되는 방대한 것이었다.
능은 개성에 있는 장릉(長陵)이며, 시호는 공효(恭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