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효순 ()

신기비결
신기비결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이칭
면숙(勉叔), 월탄(月灘)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43년(중종 38)
사망 연도
1621년(광해군 13)
본관
청주(淸州)
주요 관직
우찬성|판돈녕부사|이조판서|좌의정
목차
정의
조선 후기에,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면숙(勉叔), 호는 월탄(月灘).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한상경(韓尙敬)의 후손으로, 증조부(曾祖父)는 한사무(韓士武)이고 조부(祖父)는 한승원(韓承元)이다. 아버지는 한여필(韓汝弼), 어머니는 유엄(柳渰)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68년(선조 1) 주1이 되고, 1576년 식년문과 병과로 급제, 검열 · 수찬을 거쳐 1584년 영해부사에 임명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8월 영해에서 왜군을 격파하고 경상좌도관찰사에 승진, 순찰사를 겸임해 동해안 지역을 방비하며 군량조달에 공을 세웠다.

1594년 병조참판, 1596년 경상도 · 전라도 · 충청도의 체찰부사(體察副使)가 되었다. 그 해 한산도무과(閑山島武科)에 주2으로 참여하고, 통제사 이순신(李舜臣)과 함께 수군강화에 힘썼다. 그 뒤 지중추부사가 되었다가 남해 지역의 도순찰사로 해상군비강화에 계속 노력하였다.

1598년 전라도관찰사로서 병마수군절도사를 겸하였다. 이듬해 전라좌수사 이순신 막하의 전선감조군관(戰船監造軍官)으로 있으면서 거북선 건조에 공이 많았던 나대용(羅大用)의 건의를 받아들여 거북선 모양의 소형 무장선인 창선(鎗船) 25척을 건조하도록 하였다.

1604년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다음해 평안도관찰사 · 판중추부사 등을 거쳐, 1606년 우찬성 · 판돈녕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610년(광해군 2) 다시 이조판서를 역임한 뒤, 1616년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다.

이듬해인 1617년 이이첨을 중심으로 폐모론이 일자 소극적인 자세로 관망하는 동시에 여러 차례 사직을 청하였다. 폐모론자들은 한효순의 이러한 태도를 문제 삼아 기자헌 등과 함께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시 한효순의 태도는 『광해군일기』(중초본)에 자세히 전한다.

합사(合辭)하여 올린 상소문에서, “전 좌의정 한효순은 본래 견해를 달리했던 사람인데 인재가 부족했던 탓에 정승자리를 차지하였습니다. 당초 대론이 일어났을 때 관망한 채 거취를 결정하지 않았는데 공의가 발의되자 어쩔 수 없이 일어나긴 했으나 본래 성의가 없어 겨우 책임만 때웠을 따름입니다. (후략)” 이에 대해 광해군은, “번잡스럽게 소란 떨지 말라. 한효순의 일도 그렇다. 고관 대작으로서 서궁(인목대비)을 비호한 자가 효순 한 사람만이 아닌데, 그렇다면 일일이 죄를 주어야 하는가? (후략)”

1621년(광해군 13)에 판중추부사로 졸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 폐모론에 가담한 죄로 관직이 추탈되었으나 1908년에 신원되었다. 저서로는 『신기비결(神器秘訣)』, 『진설(陣設)』 등이 있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국조방목(國朝榜目)』
『난중잡록(亂中雜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순종실록(純宗實錄)』
주석
주1

조선 시대에, 소과(小科)인 생원과에 합격한 사람. 우리말샘

주2

조선 시대에, 과거 시험에 관계되는 시험관을 통틀어 이르던 말.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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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강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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