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종 ()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 전기, 제2대(재위: 943~945) 왕.
이칭
성명
왕무(王武)
승건(承乾)
시호
의공(義恭), 명효(明孝), 선현(宣顯)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912년(신라 신덕왕 1)
사망 연도
945년(혜종 2)
주요 관직
고려 태자, 정윤, 고려 국왕
관련 사건
왕규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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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혜종은 고려 전기 제2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1009~1031년이며, 태조와 나주 출신의 장화왕후 오씨 소생이다. 박술희의 도움을 받아 921년에 정윤으로 책봉되었으며, 통일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다. 그렇지만 혜종은 943년에 즉위한 뒤부터 계속해서 박술희와 왕위쟁탈을 노리던 왕규, 그리고 정종까지 서로 대립하면서 불안한 정국을 이어갔다. 이로 인해, 혜종은 자신의 신변 위협까지 느끼다가 병을 얻어 945년 9월에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정의
고려 전기, 제2대(재위: 943~945) 왕.
가계 및 인적사항

재위 기간은 943∼945년이다. 이름은 왕무(王武), 자(字)는 승건(承乾)이다. 912년(신라 신덕왕 1)에 태어났다. 태조 왕건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장화왕후(莊和王后) 오씨(吳氏)이다. 외가는 나주(羅州)의 호족(豪族)인 다련군(多憐君)이다.

후비(后妃)는 정윤(正胤)으로 책봉되던 921년(태조 4) 12월에 맞이한 진주인(鎭州人) 대광(大匡) 임희(林曦)의 딸인 의화왕후(義和王后) 임씨(林氏), 광주인(廣州人) 대광(大匡) 왕규(王規)의 딸인 후광주원부인(後廣州院夫人) 왕씨(王氏), 청주인(淸州人) 원보(元甫) 김긍률(金兢律)의 딸인 청주원부인(淸州院夫人) 김씨(金氏), 그리고 경주인(慶州人) 대간(大干) 연예(連乂)의 딸인 궁인(宮人) 애이주(哀伊主) 등이 있다.

아들은 의화왕후 임씨 소생의 흥화군(興和君)과 궁인 애이주 소생의 태자(太子) 제(濟) 등 2명이 있다. 딸은 의화왕후 임씨 소생의 경화궁부인(慶華宮夫人)과 정헌공주(貞憲公主), 궁인 애이주 소생의 명혜부인(明惠夫人) 등 3명이 있다. 이 가운데 경화궁부인은 945년(혜종 2)에 왕규가 왕의 동생인 요(堯)소(昭)를 참소(讒訴)했을 때 혜종이 이들을 달래기 위해 소(昭)에게 시집보냈다. 그가 훗날 광종의 후비인 경화궁부인 임씨이다.

주요 활동

왕무는 태어난 지 7년째 되던 해에 이미 태조가 태자(太子)로 삼고자 하였으나 어머니 오씨가 비천하여 세울 수 없었다. 그러나 대광(大匡) 박술희(朴述希)의 도움을 받아 921년(태조 4)에 마침내 정윤(正胤)으로 책봉되었다. 이로 인해 태자의 지위에 오른 혜종은 936년(태조 19) 태조가 후백제(後百濟)를 칠 때 박술희와 함께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출정하여 큰 공을 세웠다.

943년(태조 26) 5월 “조정 안팎의 관리들은 모두 다 동궁(東宮)의 처분을 따르라.”라는 태조의 유언을 받들어 즉위한 혜종은 계속해서 박술희의 도움을 받으면서 정치적 안정을 모색하였지만, 왕위를 노리는 적대세력 때문에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특히 강력한 호족 출신이자 왕실의 외척이었던 왕규의 노골적인 암살 음모를 가까스로 모면한 뒤에는 늘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정치에 뜻을 두지 못하였다. 이복동생인 왕요(王堯: 뒤의 정종)도 서경(西京)왕식렴(王式廉) 세력과 결탁해 은근히 왕위를 엿보았다. 그래서 혜종대의 정세는 더욱 불안한 상태에 있었다.

혜종이 병석에 눕게 되자, 왕위쟁탈을 둘러싼 음모와 갈등은 더욱 노골화되었다. 박술희와 왕규는 서로를 미워하여 병사 100여 명을 직접 데리고 다녔다. 혜종의 병이 위독했지만, 신하들은 들어가 만나지도 못하고 측근들만 곁에서 모시고 있었다. 혜종은 이런 처지에서 945년(혜종 2) 9월 중광전(重光殿)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34세였다.

혜종이 세상을 떠나자, 왕요가 서경에 있던 왕식렴의 군대를 불러들여 결국 왕위를 차지하였다. 정종은 그 뒤에 박술희에게 다른 뜻이 있다고 의심하여 유배를 보냈고, 왕규는 그 틈을 타서 왕의 명령이라 속여서 박술희를 죽였다. 또한 정종은 왕규도 귀양을 보냈다가 사람을 보내어 죽였으며 아울러 그 일당 3백여 명을 처형하였다.

그런데 왕규의 난으로 묘사된 혜종 말년의 상황에 대해서는 오히려 정종이 혜종의 지지 세력을 대표하는 박술희와 왕규의 대립을 이용하여 정변을 일으킨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정종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왕규뿐만 아니라 박술희까지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혜종의 죽음마저 정종에 의해 계획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상훈과 추모

묘호(廟號)는 혜종이고 시호(諡號)는 의공(義恭)이다. 송악산(松嶽山) 동쪽 기슭에 장사지냈다. 능의 이름은 순릉(順陵)이다. 시호는 1002년(목종 5)에 명효(明孝)를, 1014년(현종 5)에 선현(宣顯)을, 1027년(현종 18)에 고평(高平)을, 1253년(고종 40)에 경헌(景憲)을 각각 덧붙였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단행본

김갑동, 『고려전기 정치사』 (일지사, 2005)
심재석, 『고려 초기 정치사 연구』 (미주, 2014)

논문

강희웅, 「고려혜종조 왕위계승전의 신해석」 (『한국학보』 7, 일지사, 1977)
김명진, 「고려 혜종의 생애와 박술희」 (『영남학』 65,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2018)
백강녕, 「고려초 혜종과 정종의 왕위계승」 (『진단학보』 82, 진단학회, 1996)
임영희, 「고려 혜종의 죽음과 정종의 왕위계승」 (『역사학연구』 75, 호남사학회, 2019)
하현강, 「고려혜종대의 정변」 (『사학연구』 20, 한국사학회,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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