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

도선(道詵)

불교인물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도선비기』, 『송악명당기』, 『도선답산가』 등을 저술한 승려.   

확대하기축소하기프린트URL의견제시

트위터페이스북

의견제시
항목명도선
이메일올바른 형식의 이메일을 입력해 주세요.
의견
10자 이상 상세히 작성해 주세요.
첨부파일
의견제시 팝업 닫기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 진영
분야
불교
유형
인물
성격
승려
성별
출생일
827년
사망일
898년
시대
고대-남북국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도선비기』, 『송악명당기』, 『도선답산가』 등을 저술한 승려.
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호는 연기(烟起). 자는 옥룡자(玉龍子)·옥룡(玉龍). 성은 김씨(金氏). 영암 출신. 왕가의 후예라는 설도 있다.
15세에 출가하여 월유산 화엄사(華嚴寺)에서 승려가 되었다. 그 뒤, 유명한 사찰을 다니면서 수행하다가, 846년(문성왕 8) 곡성 동리산(桐裏山)의 혜철(惠徹)을 찾아가 ‘무설설(無說說) 무법법(無法法)’의 법문을 듣고 오묘한 이치를 깨달았다.
영역닫기영역열기생애 및 활동사항
850년천도사(穿道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뒤, 운봉산(雲峯山)에 굴을 파고 수도하기도 하였으며, 태백산에 움막을 치고 여름 한철을 보내기도 하였다. 전라남도 광양 백계산 옥룡사(玉龍寺)에 자리를 잡고 후학들을 지도하였는데, 언제나 수백 명의 제자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그의 명망을 들은 헌강왕은 궁궐로 초빙하여 법문을 들었다.
72세의 나이로 죽자 효공왕은 요공선사(了空禪師)라는 시호를 내렸고, 제자들이 옥룡사에 징성혜등탑(澄聖慧燈塔)을 세웠다. 고려의 숙종은 대선사(大禪師)를 추증하고 왕사(王師)를 추가하였으며, 인종은 선각국사(先覺國師)로 추봉(追封)하였다. 또한 의종은 비를 세웠다.
일설에 의하면 도선은 당나라로 유학가서 밀교승려 일행(一行)으로부터 풍수학을 배워왔다고 한다. 그러나 일행은 당나라 초기의 승려이고 도선의 생몰년은 당나라 말기에 해당하기 때문에 연대에 모순이 있고, 도선이 당나라에 유학하였다는 것도 신빙성이 없다.
도선은 승려로서보다는 음양풍수설의 대가로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 나라 풍수지리학의 역사가 신라 말기까지 거슬러올라가는 것도 도선의 생존연대가 그때였기 때문이다.
언제나 도선이 풍수지리설 같은 주술적 언어와 함께 있기 때문에, 그는 역사적 실재의 인물이라기보다는 신화적 존재로 파악되기까지 하였다. 도선이 역사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고려 태조에 의해서였다.
875년(헌강왕 1) 도선은 “지금부터 2년 뒤 반드시 고귀한 사람이 태어날 것이다.”고 하였는데, 그 예언대로 송악에서 태조가 태어났다고 한다. 이 예언 때문에 태조 이후의 고려왕들은 그를 극진히 존경하였다.
태조는 도선으로부터 직접 설법을 들은 일은 없으나 사상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태조는 예로부터 전하여 내려온 민간신앙도 보호하고 육성하면서, 동시에 민간에 널리 유포되어 있던 『도선비기(道詵秘記)』에 관해서도 대단한 관심을 쏟았다.
그는 불교신앙에서 오는 가호의 힘과 함께 참위설에서 얻어지는 힘에 의지함으로써 그 자신의 원대한 포부를 달성하려 하였다. 그래서 『훈요십조』 가운데 제2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 사원은 모두 도선이 산수의 순역(順逆)을 점쳐서 정한 자리에 개창한 것이다. 도선은 일찍이 ‘내가 점쳐서 정한 곳 이외 함부로 사원을 세우면 지덕(地德)을 손상하여 국운이 길하지 못하리라.’고 하였다.
생각컨대, 국왕·공주·왕비·조신들이 서로 원당(願堂)이라 하여 사원을 마음대로 창건한다면 큰 근심거리가 될 것이다. 신라 말엽에 사찰을 함부로 이곳저곳에 세웠기 때문에 지덕을 손상하여 나라가 멸망하였으니 경계하여야 한다.”
이와 같이 도선이 산천의 지세를 점쳐서 결정한 자리에 세워진 절이나 탑을 비보사탑(裨補寺塔)이라고 하였다. 도선의 저서라고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는 『도선비기』·『송악명당기(松岳明堂記)』·『도선답산가(道詵踏山歌)』·『삼각산명당기(三角山明堂記)』 등이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6년)
배종호
페이지 상단으로 이동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