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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蒙古)

고려시대사지명

 몽고고원을 중심으로 만주와 중국 북부 등의 지역에 걸쳐 거주하던 유목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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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칭
몽고족(Mongghol)
분야
고려시대사
유형
지명
성격
국가, 유목민족
소재지
몽고고원
시대
고려-후기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몽고고원을 중심으로 만주와 중국 북부 등의 지역에 걸쳐 거주하던 유목민족.
키워드
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몽고는 넓은 의미로는 황색 인종에 대한 범칭으로 사용되기도 하며, 국명을 지칭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 몽골(Mongol)로 호칭한다. 본래 몽고고원에서 유목생활을 하였으나 13세기 초에 흥기하여 아시아와 유럽 양대륙에 걸치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그 과정에서 고려에도 침입하여 80여 년 동안 고려의 정치에 간섭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명칭 유래
11·12세기의 몽고고원에는 나이만(Naymann), 케레이트(Kereyid), 메르키드(Merkid), 타타르(Tatar), 옹구트(Ongghud) 등의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몽고족(Mongghol)도 이러한 여러 부족 중의 하나였다. 몽고족은 여러 개의 부(部)로 분산되어 요(遼)·금(金)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몽고부족 보르지기드(Borjigid) 씨족 출신의 테무친[鐵木眞]이 1206년(희종 2) 분열된 몽고고원의 통일을 이룩하고 몽고족과 튀르크계의 모든 유목민족을 지배하게 되었다. 테무친 자신은 칸[汗]에 추대되어 칭기즈칸[成吉思汗]이라 칭하고 대몽고국(大蒙古國)을 세웠다. 칭기즈칸은 ‘대양(大洋)의 군주’ 혹은 ‘황제 중의 황제’ 등으로 해석된다.
영역닫기영역열기형성 및 변천
칭기즈칸은 1207년부터 정복전쟁을 추진하여 주위의 서하국(西夏國)·금·서요국(西遼國) 등을 정복하였고, 계속해서 서쪽으로 진출하여 중앙아시아는 물론 서아시아·남러시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몽고의 대외원정은 1227년 칭기즈칸의 사망 이후에도 오고타이[窩闊台: 太宗], 구육[貴由: 定宗], 몽케[蒙哥: 憲宗], 쿠빌라이[忽必烈: 世祖] 등에 계승되어 정복전쟁이 추진됨으로써 몽고 제국의 판도는 유라시아 대륙의 대부분에 미치게 되었다.
이 확대된 영토는 칭기즈칸의 여러 아들 및 동생들에게 분봉(分封)되었는데, 이로부터 차가타이[察合台]·오고타이·킵차크[欽察] 등의 한국(汗國)이 분립하였다. 몽고 본토는 막내아들 툴루이[拖雷]가 다스렸고, 중국 지역을 정복한 뒤 1271년(원종 12)에 국호를 원(元)으로 바꾸었다. 고려와 인접한 요동 지역은 칭기즈칸의 막내동생인 우치긴[斡赤斤]에게 분봉되었다. 따라서, 이후 몽고의 고려 침략은 주로 우치긴에 의해 이루어지게 되었다.
고려와 몽고의 관계는 1218년(고종 5)에 몽고군이 거란의 유민[契丹遺種]들을 추격하여 고려에 들어오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보다 앞서 요나라가 멸망한 뒤 금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던 거란족이 1211년(희종 7)경부터 몽고의 도움을 받아 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런데 지배층의 내분으로 야율유가(耶律留哥)가 몽고에 투항하여 조군(助軍)하였고, 이를 계기로 몽고가 거란을 공격하자 이에 쫓긴 거란의 유민들이 1216년(고종 3)고려를 침범했던 것이다.
당시 고려는 이들에 의해 북계(北界) 지방을 침탈당하고 개경마저 위협을 받았다. 그러나 곧 반격을 가하여 이들을 서경(지금의 평양) 동쪽의 강동성(江東城)에 몰아넣는 데 성공하였다. 그 사이 몽고는 카진[合眞]과 쟈라[扎刺] 휘하 1만 군사을 보내 포선만노(浦鮮萬奴)의 동진국(東眞國)과 연합하여 거란 유민을 뒤쫓아 고려에 들어왔고, 추위와 군량 부족으로 곤경에 처하게 되자 고려에 군량과 원병을 요구하였다. 고려에서는 이를 받아들여 서북면원수 조충(趙冲)과 병마사 김취려(金就礪)가 군사를 이끌고 몽고군과 합세하여 강동성에 웅거한 거란족을 섬멸하였다.
그 직후 몽고의 요구에 따라 두 나라 사이에 형제맹약(兄弟盟約)이 맺어짐으로써 고려는 몽고를 형의 나라로 받들며 외교관계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몽고는 고려에 대해 공납을 강요해왔고, 고려 측에서는 몽고의 과중한 요구와 몽고 사신들의 고압적인 자세에 반발하여 두 나라 사이에 긴장감이 일게 되었다.
이러한 때 마침 공납을 독촉하기 위해 고려에 파견된 몽고 사신 저고여(著古與)가 돌아가는 길에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여 이후 몽고가 고려를 침공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즉, 몽고는 이 사건을 고려 측의 소행이라 단정하고 국교를 단절하였으며, 이후 1231년부터 1259년까지 29년 동안 7차에 걸쳐 고려를 침입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몽고의 고려 침입
(1) 1차 침입
1229년에 몽고에서는 칭기즈칸의 뒤를 이어 오고타이가 칸에 올라 요동 방면의 동진국 및 금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였고, 1231년 8월부터는 고려를 침공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사르타이[撒禮塔]가 이끄는 몽고군은 함신진(咸新鎭)주 01)을 거쳐 철주(鐵州)주 02)·구주(龜州)주 03)·정주(靜州)·안북부(安北府)주 04)·서경·황주(黃州)·봉주(鳳州)주 05)·평주(平州)주 06)를 차례로 공략하였고, 연말 경에는 개경을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고려에 항복을 요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양주·광주·충주·청주에까지 남하하여 여러 성들을 공격하였다. 이에 고려에서는 내륙로에 위치한 구주·자주(慈州) 등에서 분전하여 성을 지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북계병마사 채송년(蔡松年)의 지휘 아래 여러 도의 군사를 모아 적에게 대항하려는 시도가 수포로 돌아가고, 고려 삼군이 안북부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함으로써 몽고군의 남하를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개경이 포위되기에 이르자 고종은 어쩔 수 없이 몽고의 권항사(權降使)를 인견하고, 왕족 회안공 정(淮安公挺)을 사르타이의 둔소에 보내 화의를 추진하게 되었다.
1차 침입으로 몽고군은 고려의 국경 군사구역인 북계 여러 성을 공략하는데 성공하였다. 또한 북계 지역의 지배를 보다 항구화하기 위해 72명의 다루가치[達魯花赤]를 점령지 및 요충지에 설치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였으며, 탐마적군(探馬赤軍)을 배치하여 다루가치를 보호하는 한편 군사적 지배를 실현하려 하였다. 그리고 두 나라간의 화의가 진전됨에 따라 이듬해 정월 일단 몽고 군대를 철수시켰다.
(2) 2차 침입
고려는 비록 몽고와 화의를 맺기는 하였지만, 이것이 고려의 본의는 결코 아니었다. 게다가 몽고에서는 도단(都旦)을 다루가치로 삼아 개경에 파견하였는데, 그의 오만무례한 행동과 몽고로부터의 과중한 공물 요구는 고려 군신들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하였다.
이에 당시 무신집정(武臣執政)이던 최우(崔瑀)는 몽고군이 수전(水戰)에 익숙하지 못한 것을 이용하여 1232년 6월 16일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각지의 주민들을 산성과 해도(海島)에 입보(入保)시키는 등 몽고에 대한 항전태세를 분명히 하였다. 또한, 이를 전후하여 내시 윤복창(尹復昌)과 서경순무사 민희(閔曦)가 각각 서북면과 서경에서 다루가치를 습격하는 일이 차례로 발생하였다.
고려에서의 북계수복운동과 재항전 움직임에 자극을 받은 몽고는 다시 고려를 침략하였다. 1232년에 사르타이가 이끄는 몽고군은 고려 정부에 대해 개경환도(開京還都)를 요구하면서 경상도까지 남하하여 약탈과 파괴를 자행하였다. 그러나 고려는 몽고의 요구를 끝내 거부하면서 항전을 계속하였다.
이해 12월에는 수주(水州)주 07)의 속읍인 처인성(處仁城)주 08)에서 김윤후(金允侯)가 부곡민(部曲民)을 지휘하여 적장 사르타이를 사살함으로써, 지휘관을 잃은 몽고군은 부장 데구[鐵哥]의 인솔 아래 서둘러 철수하였다.
또한, 다음해 북계병마사 민희가 최우의 가병(家兵) 3,000명을 이끌고 서경을 공격하여, 몽고의 1차 침입 때 사르타이에게 투항한 뒤 몽고군의 길잡이가 되었던 홍복원(洪福源) 일당을 랴오양[遼陽] 지방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3) 3차 침입
고려에서 패퇴한 직후 몽고는 주위의 동진국과 금을 정벌하는 데 힘을 기울이느라 미처 고려에 신경을 쓰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고려는 약 2년 동안 몽고의 침입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몽고는 1233년에 동진국을, 1234년에는 금을 차례로 멸망시키고 계속해서 남송을 공격해서 압박하였다. 한편, 1235년부터 다시 고려를 침략하였는데, 3차 침입은 5년이라는 장기간에 걸쳐 계속되었다.
3차 침입은 이전의 패퇴에 대한 보복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어, 탕구[唐古]를 주장으로 한 몽고군은 고려에 화의를 교섭해 오는 일이 없이 경상·전라도까지 침공하여 전 국토를 유린하였다.
이에 고려에서는 개주(价州)·온수(溫水)주 09)·죽주(竹州)주 10)·대흥(大興)주 11) 등지에서 몽고군의 공격을 막아내는 성과를 거두었고, 각지의 산성에 방호별감(防護別監)을 파견하여 항전을 독려하였다. 불력(佛力)에 의지해 몽고군을 격퇴하고자『팔만대장경』을 조판하기 시작한 것도 이 때의 일이었다. 그러나 몽고군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지 못한 채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고려의 국토는 황폐화되고, 백성들은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결국, 고려는 1238년에 장군 김보정(金寶鼎)과 어사(御史) 송언기(宋彦琦)를 몽고에 보내 강화를 제의하고 철군을 요청하였다. 이에 몽고는 고려 국왕의 친조(親朝)를 조건으로 고려의 요구를 받아들여 다음해 모두 철수하였다. 그러나 국왕이 직접 외국에 입조하는 것이 역사상 전례가 없을 뿐더러, 당시 상황에서는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다. 따라서, 고려에서는 고종이 모후 유씨(柳氏)의 상중임을 들어 왕족 신안공 전(新安公 佺)을 왕의 동생이라 칭하고 대신 입조하도록 하였다.
그 다음해 신안공 전은 무사히 귀국하였지만, 이때 몽고는 사신을 함께 보내 새로운 요구를 해왔다. 즉, 해도에 입보하고 있는 민호(民戶)를 육지로 돌아오게 하고 그 수효를 점검해 보고할 것과 독로화(禿魯花), 즉 인질을 보낼 것, 그리고 반몽행위를 한 고려의 관원들을 몽고로 압송할 것 등이었다.
이에 고려에서는 신안공 전의 종형(從兄)인 영녕공 준(永寧公 綧)을 왕의 애자(愛子)라 하여 귀족의 자제 10명과 함께 독로화로 몽고에 파견하였다. 그런데 이 때 마침 몽고에서는 오고타이가 죽고 칸위(汗位) 계승을 둘러싼 내분이 일어나서 고려에 더 이상의 요구를 할 수 없었다. 이에 고려는 독로화의 파견만으로 몽고와의 화의를 당분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4) 4차 침입
몽고에서 약 5년간의 분규 끝에 구육(뒤의 定宗)이 즉위하여 국내의 안정을 이루게 되자, 그 다음해인 1247년에 고려의 국왕친조와 출륙환도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을 이유로 다시 고려를 칩입해왔다.
몽고 원수 아무간(阿母侃)이 홍복원을 대동하고, 군대를 이끌고 개경 및 강화 연안까지 쳐들어와 강화도 정부를 압박하였다. 그러나 다음해 몽고에서 구육이 죽고 칸위 계승을 둘러싼 다툼이 다시 일어나자 몽고군은 곧장 철수하였다. 따라서 전쟁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지는 않았고, 고려 측의 피해도 별로 크지 않았다.
(5) 5차 침입
1251년(고종 38) 내분 끝에 즉위한 몽케(뒤의 憲宗)는 곧바로 고려에 사신을 보내와 국왕친조와 출륙환도를 재촉하였다. 이에 고려에서는 다음해 1월이현(李峴)을 몽고에 파견하여 같은 해 6월 국왕이 친조할 것이라는 약속을 하였다.
그러자 몽고에서는 다시 사신을 보내와 국왕이 직접 출륙하여 이를 맞이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무신집정 최항(崔沆)의 반대로 국왕의 출륙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몽고 사신은 이를 힐난하면서 되돌아가버렸다.
이 일이 있은 다음해인 1253년에 몽고는 예꾸[也窟, 也古]를 주장으로 하여 또 다시 고려를 침입하였다. 예꾸는 군사적인 공략을 전개하는 한편, 강화도에 사신을 보내 국왕의 출륙을 촉구하였다. 고려에서도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하였지만 역시 최항의 반대로 교섭이 결렬되고 두 나라 사이에 또다시 심각한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때 고려정부는 충실도감(充實都監)을 두고 군사력을 보강하였으며, 각지의 민호를 다시 해도와 산성에 입보시키는 등 항전의 결의를 굳게 하였다. 특히 방호별감 김윤후가 지휘한 충주민은 70여 일간 성을 사수함으로써 몽고군의 남진을 저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려의 치열한 항쟁에도 불구하고 몽고군은 전국 각지에서 약탈·파괴를 자행하였고, 고려의 피해는 날로 커지게 되었다. 결국 고려는 몽고의 요구를 받아들여 고종이 강화도를 나와 승천부(昇天府)에서 예꾸의 사신을 맞이하였고, 뒤이어 왕자 안경공 창(安慶公 淐)을 몽고에 보내 국왕의 친조를 대신하게 하였다. 이로써 몽고와 화의가 이루어졌으며, 전쟁은 당분간 중지되었다.
(6) 6차 침입
몽고군이 철수한 지 약 반 년이 지난 1254년 7월에 몽고는 또 다시 사신을 보내와 이번에는 최항을 비롯한 고려 정부가 완전히 개경으로 환도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와 동시에 자랄타이[車羅大]가 이끄는 몽고군이 고려에 침입하여 전 국토를 유린하였다. 이때 고려의 피해는 실로 막심하였다.『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이 한 해 동안 몽고군에게 포로가 된 사람이 206,800여 명이었고, 살육된 사람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며, 몽고군이 거치고 지나간 주·현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고려의 대항도 결코 만만치 않아 경상·전라도의 별초군(別抄軍)을 뽑아올려 강화도의 수비를 강화하는 한편, 각 지방에서는 별초군과 백성들이 끈질기게 항전하여 몽고군에게도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특히 충청도 다인철소(多仁鐵所) 백성들의 승전에 대한 포상으로 강화도 정부가 소(所)에서 익안현(益安縣)으로 승격시킬 정도로 일반 백성들의 자발적인 항쟁이 전개되었다. 이에 자랄타이는 고려 측의 태도 변화를 기다리면서 일단 북계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1256년고려에서 출륙환도를 시행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자 자랄타이의 몽고군은 다시 공격을 시작하였다. 이번에는 주로 서해안 지역을 공략하면서 강화도 갑곶(甲串)의 맞은 편에 군사를 집결시켜 강화도의 고려 정부를 위협하였다. 이에 고려에서는 전략해도에 입보하고 있던 해도입보민들의 분전과 수군의 활약으로 몽고군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때마침 몽고에 사신으로 파견된 김수강(金守剛)의 외교활동이 일정한 효과를 거두어 몽고군은 모두 철수하였다.
몽고군이 철수한 뒤에도 고려는 국왕친조와 출륙환도를 지연시키고 있었고, 더욱이 1257년에는 해마다 몽고에 보내던 공물마저 중단하였다. 이에 자극을 받은 몽고는 같은 해 6월에 자랄타이로 하여금 다시 고려를 침공하도록 하였다. 이때 몽고군은 서해도·양광도·충청도 등지를 약탈하는 한편, 고려에 대한 요구 조건을 완화하여 국왕의 친조를 태자의 입조로 대신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리고 고려 측에서도 이 조건을 받아들임으로써 곧 강화가 성립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고려에서 태자의 입조를 시행하지 않고 안경공 창을 다시 파견하였으므로 몽고군은 다시 북계에 집결하여 고려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1258년(고종 45)에 강화도에서 무신집정 최의(崔竩)가 유경(柳璥)·김준(金俊) 등에게 살해당함으로써 이제까지 화·전 양면에 걸쳐 항전을 고집해 왔던 최씨정권이 붕괴되었다. 이와 동시에 최자(崔滋)·김보정 등에 의해 대몽강화론(對蒙講和論)이 강력하게 대두되었다. 이로부터 몽고와의 화의교섭이 급속하게 진전되어, 이 해 5월에 고종이 강화에서 나와 승천부에서 몽고의 사신을 맞이하였다.
그리고 12월에는 박희실(朴希實)과 조문주(趙文柱)를 몽고 헌종몽케의 행영(行營)에 보내 최의를 제거했음을 알리고 출륙환도와 태자의 입조를 곧 실행할 것을 약속하였다. 이때 박희실·조문주가 몽고 황제와 체결한 협정 중에서 “출륙환도는 3년을 기한으로 개경복구공사가 완료되면 시행한다”는 조항이 있었는데, 이 조항은 김준정권이 즉각적인 출륙환도를 거부하고 벼랑끝 외교전술을 구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태자친조 약속에 따라 다음해 3월 태자 전(倎)주 12)을 몽고에 파견하였다. 이로써 두 나라 사이에 화의가 성립되고 29년 동안 계속된 전쟁은 완전히 끝나게 되었다.
그러나 화의가 고려 측의 일방적인 항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 고려는 태자입조의 대가로서 고려의 풍속을 바꾸지 않을 것[不改土風], 몽고 사신의 빈번한 왕래를 자제할 것, 개경환도를 재촉하지 말 것, 몽고군을 모두 철수시킬 것, 다루가치를 두지 말 것 등을 몽고에 요구하여 관철시켰다. 이러한 외교적 성과는 전쟁기간에 보여준 고려인들의 끈질긴 저항에 힘입어 얻어진 것이었다.
1259년 고려와 몽고 사이에 강화가 성립된 직후 몽고에서는 몽케가 죽고 내전 끝에 쿠빌라이(뒤의 世祖)가 즉위하여 남송에 대한 공격도 중지한 채 국내의 안정을 꾀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 고려와의 강화 성립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며, 무리한 요구로 고려를 압박할 필요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고려에서도 이 해원종이 즉위하여 몽고와의 화의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1261년(원종 2) 태자 심(諶)주 13)이 입조하였고, 1264년 역사상 처음으로 국왕이 친조하게 되었다. 그러나 강화도의 무신정권인 김준정권은 계속 출륙환도를 지연시키면서, 몽고의 직접적인 압력이 미치지 않는 틈을 이용하여 세력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몽고는 일본정벌을 계획하고 1266년고려에 대해 이에 협력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1268년에 사신을 보내와 출륙환도를 재촉하면서 그 지연의 책임을 들어 무신집정 김준을 소환하는 등 다시 강압적인 자세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에 무신정권 내부에서 몽고 사신을 죽이고 도읍을 제주도로 옮기자는 해도재천론(海島再遷論)이 제기되고 몽고와 재대결하자는 의견이 대두했으나, 화의를 주장하는 국왕 및 문신들의 반대로 실행되지 못하였다.
그러자 이러한 상황에 불만을 품은 임연(林衍)이 김준을 제거하고 다음해 원종마저 폐위한 다음 권력을 장악하고 강력한 무신정권을 재건하려 하였다. 그러나 당시 몽고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원종을 복위시킬 것을 강력하게 요구해왔고, 결국 임연이 이에 굴복함으로써 원종이 복위하였다.
그런데 몽고의 압력에 힘입어 복위한 원종은 재차 몽고에 친조하여 출륙환도를 약속하고 임연을 제거하기 위한 군대를 요청하였다. 이것을 몽고 황제가 수용하게 되자 원종은 몽가독(蒙哥篤)이 지휘하는 몽고의 군대와 함께 귀국하였고, 곧 강화도의 무신정권에 대해 출륙 명령을 내렸다.
이 때 임연의 뒤를 이어 무신집정이 된 임유무(林惟茂)는 각지에 야별초(夜別抄)를 보내 주민들을 산성과 해도에 다시 입보시키고 대항하려 하였다. 그러나 강화도에서 임유무의 매부 홍문계(洪文系, 洪奎)와 송송례(宋松禮) 등이 임유무를 죽임으로써 항전을 고집하던 무신정권은 완전히 종식되고 곧 출륙환도가 실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몽고가 고려의 정치에 간섭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실제로 1270년에 다루가치가 다시 파견되었고, 봉주에 둔전경략사(屯田經略司)가 설치되어 몽고군이 고려에 주둔하게 되었다. 더욱이, 개경환도에 반발하여 삼별초가 봉기하여 강화도→진도→제주도로 거점을 옮기며 항전하자 몽고의 군사력에 의지하여 3년여에 걸쳐 이를 진압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대몽항전의 역사적 의의
삼별초항쟁이 진압됨으로써 고려 내의 반몽세력은 완전히 제거되고 고려지배층의 몽고에 대한 의존적 자세는 심화되어갔다. 그 결과, 고려는 29년에 걸친 끈질긴 대몽항쟁에도 불구하고 이후 원나라의 간섭을 받으면서 자주성을 크게 침해당하게 되었다.
우선, 정치면에서는 원의 부마국으로 전락하여 관제나 의전 등이 모두 제후국으로 격하되었고, 만호부(萬戶府)나 홀치[忽赤] 등 몽고식 관제가 들어왔다. 특히 군사제도에서는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었다. 몽고와의 전쟁 중에 동북면과 서북면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와 동녕부(東寧府)가 각각 설치되었고, 삼별초가 진압된 뒤 제주도에 탐라총관부(耽羅摠管府)가 설치되어 직접 몽고지배 하에 편제됨으로써 고려의 영역이 축소되기도 하였다.
사회적으로는 이후 80여년 동안 원나라의 간섭을 받으면서 몽고의 풍속, 즉 몽고풍의 영향을 받아 몽고식 의복과 변발이 유행하는 등 고려의 풍속에 적지 않은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몽고와의 전쟁과 뒤이은 원나라의 간섭에 의해 가장 심각한 타격을 입은 것은 경제적인 면이었다. 약 30년 동안 계속된 장기간의 전쟁으로 국토는 거의 황폐해졌다. 게다가 원나라에 의한 공물 수탈과 1274년(충렬왕 원년)·1281년(충렬왕 7)의 두 차례에 걸친 일본원정은 고려의 일반민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안겨주었다. 또한 무신집권기부터 발달하기 시작한 농장은 원나라 간섭기에 들어와 더욱 확대되어 소수의 부원배 및 권문세족에 의한 무차별적인 토지 탈점으로 농민들은 민생을 회복시킬 여유도 없이 이중의 피해를 당하였다.
한편 문화적 손실도 막대하여 몽고의 침입에 의해 대구의 부인사『초조대장경』을 비롯해 신라 때부터 국보였던 황룡사의 9층목탑, 장육존상, 황룡사종 등 많은 문화재가 소실되기도 하였다.
29년 동안 계속된 전쟁에서 몽고의 침입에 대항한 진정한 주체는 최씨정권이 아니라 각지의 농민·천민들이었다. 당시 고려에는 전기 이래의 이군육위 군사제도가 붕괴되고 집권 무신들이 자신의 신변보호와 정권유지를 위해 많은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러나 사병은 대몽전쟁 일선에는 거의 투입되지 않았고, 특히 최우의 사병은 고려가 강화도로 천도한 뒤 주로 강화도 수비에만 동원되었다.
따라서 각지의 농민들은 산성이나 해도에 입보하여 몽고군과 치열한 항전을 벌였다. 몽고의 1차 침입 때 서북면도병마사 박서(朴犀)가 지휘한 구주성이나 자주부사(慈州副使) 최춘명(崔椿命)이 지휘한 자주성에서의 승리는 그곳의 농민과 주진군들이 자발적으로 참전하여 얻어낸 것이었다.
부곡민이나 천민들도 대몽항쟁에 적극 참여하였다. 몽고의 2차침입 때 김윤후가 적장 사르타이를 사살하였던 처인성의 전투는 매우 주목할 만한 것으로, 이곳의 주력부대는 바로 부곡민들이었다. 또한 6차 침입 때 다인철소에서의 승리 역시 소민들에 의한 것이었다.
이와 더불어 특히 전쟁 초기의 항전으로서 두드러지는 것이 초적(草賊)들의 활약이었다. 초적은 무신집권기에 과중한 수탈을 견디지 못하고 봉기한 농민들 혹은 군인전을 탈점당하고 유랑했던 몰락 군인층이었지만, 일단 몽고의 침입을 당해서는 정부군과 합세하여 외침에 대항했다. 마산 초적과 관악산의 초적들도 몽고권에 대항했으며, 충주성에서는 관료들이 모두 도망친 상황에서 지광수(池光守)의 지휘 하에 노비와 잡류(雜類)에 속하는 주민들이 들고 일어나 몽고군을 퇴각시켰다.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부곡민과 노비들의 저항이 몽고군에 대항하는 데 큰 힘이 되었던 것은 매우 특기할 만한 일이다.
반면 최씨정권은 정권유지와 강화도 방어에만 급급하여 효과적인 대몽항쟁을 전개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강화도에서 개경 시절과 다름없는 사치를 누리면서 이를 지탱하기 위해 일반민에 대해 과중한 수탈을 계속하였다. 따라서 육지에 남아 있던 일반민들은 몽고의 침략과 강화도 정부의 수탈로 인해 이중의 어려움을 겪게 되었지만, 그러한 난관 속에서도 끈질기게 항전하여 국토를 지켰던 것이다. 이 때문에 대몽강화가 성립된 뒤 고려 정부의 출륙환도에 반대하여 삼별초가 봉기했을 때도 개경과 밀성(密城)주 14) 등지에서 관노와 농민들이 이에 호응하여 항몽의 의지를 보였던 것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원사(元史)

  • 원고려기사(元高麗紀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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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숙(숙명여자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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