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 ()

한문학
인물
조선 전기, 참지의정부사,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한 시인. 문신, 학자.
이칭
읍취헌(挹翠軒)
중열(仲說)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479년(성종 10)
사망 연도
1504년(연산군 10)
본관
고령(高嶺)
주요 저서
읍취헌유고(挹翠軒遺稿)
주요 작품
복령사(福靈寺)
주요 관직
승문원권지|홍문관정자|경연관
관련 사건
갑자사화
내용 요약

박은(朴誾)은 조선 전기 참지의정부사,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한 시인이자 문신, 학자이다.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2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용재(容齋) 이행(李荇)과 더불어 16세기 초 한시 문단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해동강서파(海東江西派)'라 일컬어진다. 문집으로 『읍취헌유고(挹翠軒遺稿)』 1책이 전한다.

정의
조선 전기, 참지의정부사,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한 시인. 문신, 학자.
가계 및 인적 사항

박은의 본관은 고령(高嶺)이고 자는 중열(仲說), 호는 읍취헌(挹翠軒)이다. 아버지는 한성부판관 박담손(朴聃孫)이며, 어머니는 제용감직장(濟用監直長) 이이(李苡)의 딸이다.

주요 활동

박은은 어려서부터 범상치 않았으며, 정신과 골격이 맑고 눈썹과 눈이 그림처럼 아름다워 속세에 사는 사람 같지 않았다고 한다. 이미 4세에 독서할 줄 알았고 8세에 대의를 알았으며 김종직(金宗直)최부(崔溥)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493년(성종 24) 15세에 이르러서는 문장에 능통하였으며, 당시 대제학이었던 신용개(申用漑)가 이를 기특하게 여겨 사위로 삼았다.

박은은 1495년(연산군 1) 17세로 진사가 되었고, 이듬해에는 식년 주1주2로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正字)가 되었다. 같은 해 사가독서자(賜暇讀書者)로 선발되어 신용개(申用漑), 김일손(金馹孫), 남곤(南袞) 등 14인과 함께 용산(龍山) 독서당(讀書堂)에서 공부하였다. 승문원 주3를 받고 홍문관에 선택되어 정자가 되고, 수찬에 있으면서 5년 동안 경연관(經筵官)을 겸하였다.

1498년(연산군 4) 20세의 나이로 유자광(柳子光)의 간사함과 성준(成俊)이 유자광에게 아첨함을 고발하는 소(疏)를 올렸으나 오히려 그들의 모함을 받았다. 평소 직언을 꺼린 연산군은 "사사부실(詐似不實)"이라는 죄목으로 박은을 파직시켰다. 박은은 1501년(연산군 7) 23세에 파직되어 옥에 갇혔다.

파직으로 인해 경제적 · 정신적으로도 불안정하게 되자, 이때부터 스스로 세속 사람에게 용납되지 못할 것을 알고 자연에 묻혀 밤낮으로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며 세월을 보냈다. 1503년(연산군 9)에 어려운 가정을 힘겹게 꾸려나간 아내 신씨가 25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 이듬해에 다시 지제교(知製敎)로 임명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박은은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에 동래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의금부에 투옥되었지만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6월 15일 “거짓 충성으로 스스로의 편안함을 구하고 주6으로서 장관을 업신여겼다[詐忠自安 新進侮長官].”라는 죄목으로 주7, 그의 나이 26세였다. 죽은 뒤 3년 후 1507년(중종 2) 주8이 되고 도승지주9.

창작 경향과 작품

박은의 시는 주로 자신이 파직된 이후부터 아내가 죽기 전까지 지어진 것이다. 그는 시를 통해 현실 세계에서 벗어나 온갖 고뇌로부터 정신적으로 평화로워지고자 하였다. 그의 시에는 현실 주10을 위한 노력과 주변 인물의 죽음을 통한 인생무상이 담겨 있다.

박은은 해동강서파(海東江西派)의 대표적 시인이다. 그는 천재적인 시인으로 짧은 생애에 비해 적지 않은 시작품을 남겼으며 후대의 대가들로부터 우리나라 제일의 시인으로 추대된다. 그는 김창협, 김만중, 김춘택으로부터 우리나라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 받았다. 그의 시는 강서시풍(江西詩風) 특히 황산곡(黃山谷)과 주11의 시풍을 수용하면서 송시적(宋詩的) 특질을 지니며 아울러 당시적(唐詩的) 특질을 공유하고 있다는 평을 받는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경사편」 5 「논사류」 2에 보면, 「동국(東國) 제일의 인재(人材)에 대한 변증설」이 있다. 그 글에서 이규경(李圭景)은 박은의 시를 동국 제일로 꼽았다.

허균(許筠)『학산초담(鶴山樵談)』에서, 박은을 김계온(金季昷) · 김시습(金時習) · 이행(李荇) · 김정(金淨) · 정사룡(鄭士龍) · 노수신(盧守愼)과 함께 언급하면서, 이들을 명나라 복고파인 전후칠자(前後七子)와 비교하였다.

홍대용(洪大容) 역시 『항전척독(杭傳尺牘)』의 「추루에게 준 편지〔與秋書〕」에서, 박은과 노수신(盧守愼)을 '동방의 이백 · 두보'라 일컬었다.

정조는 박은의 시가 정경이 융합되어 당시와 송시의 경지를 뛰어넘어 독자적인 시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고 평가하며, 그를 ‘조선조에서 제일가는 시인’으로 추앙하였다. 그의 유고집인 『읍취헌유고(挹翠軒遺稿)』에 어제 서문을 써 주었으며, 그 책을 간행하여 반포토록 명하였다. 이에 박은의 절친한 친구인 이행(李荇)이 그의 시를 모아 『읍취헌유고』 1책을 간행하였다.

참고문헌

원전

『견한잡록(遣閑雜錄)』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대동기문(大東奇聞)』
『북헌잡설(北軒雜說)』
『성수시화(惺叟詩話)』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용재집(容齋集)』
『읍취헌유고(挹翠軒遺稿)』
『중종실록(中宗實錄)』
『천마잠두록(天磨蠶頭錄)』
『해동잡록(海東雜錄)』
『홍재전서(弘齋全書)』

단행본

이종묵, 『해동강서시파연구』(태학사. 1995)
홍순석, 『朴誾의 生涯와 詩』(일지사, 1986)

논문

김은정, 「박은론」(『한국한시작가연구』 4, 태학사, 1995)
김현주, 「읍취헌 박은 시의 풍격 연구」(『한문학논집』 23, 근역한문학회, 2005)
심경호, 「『(국역) 읍취헌유고』 해제」(『(국역) 읍취헌유고』, 민족문화추진회, 2006)
홍순석, 「박은 시의 수사기교 연구(1)-拗體의 분석을 중심으로-」(『한국한문학연구』 34, 한국한문학회, 2004)
홍순석, 「읍취헌박은연구(挹翠軒朴誾硏究)」(『국문학논집』 11, 단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1983)
주석
주1

식년 문과(式年文科): 식년마다 보던 식년과의 시험 가운데 문과를 이르는 말. 식년과에는 식년 문과, 식년 무과, 식년 잡과가 있었다. 우리말샘

주2

조선 시대에, 과거 합격자를 성적에 따라 나누던 세 등급 가운데 셋째 등급. 문과(文科)에서는 23명, 무과(武科)에서는 20명을 뽑아 정구품의 품계를 주었으며, 성균관ㆍ승문원ㆍ교서관의 임시직인 권지(權知)에 임명하였다. 우리말샘

주3

권지(權知): 조선 시대에, 과거 합격자로서 성균관, 승문원, 교서관, 훈련원, 별시위 등에 나누어 배치되어 임용 대기 중인 견습 관원. 문과 출신의 경우 삼관(三館)인 성균관, 승문원, 교서관에 나누어 배치되고 무과 출신의 경우 훈련원과 별시위에 나누어 배치되었다. 우리말샘

주4

남자의 스무 살 전후의 나이. 우리말샘

주5

남의 일을 아랑곳하여 시비하다. 우리말샘

주6

새로 벼슬에 오름. 또는 그런 사람. 우리말샘

주7

죄인의 목이 베어져 높은 곳에 매달리다. 우리말샘

주8

가슴에 맺힌 원한을 풀어 버림. 우리말샘

주9

나라에 공로가 있는 벼슬아치가 죽은 뒤에 품계가 높아지다. 우리말샘

주10

어려움 따위를 넘어 극복해 냄. 우리말샘

주11

중국 북송 때의 시인(1053~1101). 시를 잘 지었고 고아하고 절개가 있었으나 빈곤하게 살다가 죽었다. 황정견(黃庭堅)의 시풍을 따랐으며 ‘소문 육군자(蘇門六君子)’ 중 한 사람이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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