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률사 ()

목차
관련 정보
불교
유적
경상북도 경주시 금강산(金剛山)에 있는 사찰.
유적
건립 시기
남북국시대
관련 국가
통일신라
관련 인물
부례랑(夫禮郎)
소재지
경북 경주시 산업로 4214-110
내용 요약

백률사는 경상북도 경주시 금강산(金剛山)에 있는 사찰이다. 신라의 삼국통일 전후 시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며 또는 법흥왕 때 창건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관음상의 영험으로 널리 알려졌다.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佛國寺)의 말사이다.

키워드
목차
정의
경상북도 경주시 금강산(金剛山)에 있는 사찰.
창건 배경

백률사의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이 절의 대비관음상(大悲觀音像)은 중국의 공장(工匠)이 만든 것이라는 주9이 있다. 또한 이 관음상에 얽힌 영험이 693년(효소왕 2)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삼국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이 대비관음상이 언제 조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주11 일이 많았다고 한다. 692년에 국선(國仙)이 된 부례랑(夫禮郎)은 693년 3월에 화랑의 무리를 거느리고 북명(北溟)의 주12에 이르렀다가 주10에게 잡혀갔다. 문객(門客)들은 당황하여 되돌아갔으나 안상(安常)만이 그를 뒤쫓아 갔다. 효소왕은 이 소식을 듣고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였다. 그때 서운(瑞雲)이 천존고(天尊庫)를 덮었으므로 내고(內庫)를 조사시켰더니 현금(玄琴)과 신적(神笛)의 두 보물이 없어졌다. 이후 5월에 부례랑의 부모는 이 관음상 앞에서 여러 날 기도를 드리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주2 위에 현금과 신적이 있고, 부례랑과 안상 두 사람도 불상 뒤에 와 있었다. 부모가 놀라 그 내력을 물으니, 부례랑이 적에게 잡혀가서 말 먹이는 자가 되어 방목(放牧)을 하고 있는데 용모가 단정한 승려가 손에 현금과 신적을 가지고 와서 위로하며 “나를 따라오라.”라고 하였다. 해변에 이르러 거기서 안상과 만나게 되었다. 승려는 신적을 둘로 쪼개어 부례랑과 안상이 하나씩 타게 하고 자기는 현금을 타고 하늘을 날아서 잠깐 사이에 백률사에 왔다는 것이었다. 부례랑이 현금과 신적을 왕에게 바치고 이 사실을 아뢰니, 왕은 이 절에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과 마납 가사(摩衲袈娑)를 바쳐 부처님의 은덕에 보답하였다.

한편 창건과 관련하여 『삼국유사』의 「원종흥법 염촉멸신」에서 527년(법흥왕 14)에 불교의 전파를 위하여 이차돈(異次頓)이 순교를 자청했을 때, 그의 목을 베자 흰 우유가 솟았고, 잘린 목은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다가 떨어졌는데, 바로 그 떨어진 곳을 자추사(刺楸寺)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자추사의 의미를 해석하여 지금의 백률사가 곧 자추사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변천

고려시대에 백률사에 왔다가 남긴 박효수(朴孝修)의 시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수록되어 있다. 시의 내용을 보면 2~3명의 승려가 머물고 있어 크게 번성한 사찰은 아니지만 법당에 관음보살상을 봉안하고 있고 그 영험담이 전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초인 1412년(태종 12)에 백률사의 관음상을 개경사로 이안했다는 기록을 통해 이때까지 사세를 유지했으며, 백률사 관음상에 대한 신앙이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전각들이 소실되었다. 이후 1604년에 경주 부윤 이시언(李時彦)이 명하여 백률사가 중건되었다.

현황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불국사(佛國寺)주3이다.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던 국보 제28호의 금동 약사여래 입상(金銅藥師如來立像)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졌으며, 현존하는 주14로는 대웅전과 선원(禪院) · 주4가 있다.

이 중 대웅전은 약 3m 높이의 주5 위에 있으며, 선조 때에 중창한 것이다. 주7으로 정면 3칸, 옆면 3칸이다. 또한 경내에 있는 자연 암벽에 조각되어 있는 마애탑(磨崖塔)은 높이 3.2m나 되는 삼층탑으로 특이한 양식을 지니고 있으며, 주15가 온전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는 백률사 대웅전 앞에 탑을 건립할 자리가 없어 소금강산에 만들었다고 전하고 있다. 또 금강산 정상에서 북쪽 30m 아래 지점에는 마애 삼존 좌상(磨崖三尊坐像)이 있는데 손이나 얼굴 모습을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마멸되어 있다. 아미타불(阿彌陀佛) 양옆에 협시보살(脇侍菩薩)이 있으나 풍화가 심하여 조각 수법을 파악하기 어렵다.

이밖에도 옛 건물에 쓰였던 것으로 보이는 초석석등주8 등이 있다. 1972년에는 대웅전 동편 암벽에서 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음각(陰刻)된 칠층탑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백률사 주변에서 발견된 백률사 석당기(栢律寺石幢記)는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참고문헌

원전

『삼국유사』
『태종실록』

단행본

한국불교연구원, 『한국의 사찰 3-신라의 폐사Ⅰ-』(일지사, 1974)
『문화유적총람』(문화재관리국, 1976)
권상로 편, 『한국사찰전서』(동국대학교 출판부, 1979)

논문

신선혜, 「『삼국유사』 탑상편 백률사 조의 종합적 검토」(『신라문화제학술발표논문집』 26,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2015)
여성구, 「신라의 백률사와 관음보살상」(『한국고대사탐구』 27,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017)
주석
주1

신기하고 이상함.

주2

향로를 올려놓는 탁자. 우리말샘

주3

불교의 한 종파의 우두머리인 큰절의 관리를 받는 작은 절. 또는 큰절에서 갈라져 나온 절. 우리말샘

주4

절에 있는 승려들이 거처하는 집. 우리말샘

주5

높이 쌓아 올린 대나 터. 우리말샘

주6

기둥머리 위와 기둥과 기둥 사이의 공간에 공포(栱包)를 짜 올린 집. ⇒규범 표기는 ‘다폿집’이다. 우리말샘

주7

기둥머리 위와 기둥과 기둥 사이의 공간에 공포(栱包)를 짜 올린 집. 우리말샘

주8

석탑이나 석등 따위의 위에 지붕처럼 덮는 돌. 우리말샘

주9

예로부터 전하여 내려옴. 우리말샘

주10

중국 수나라ㆍ당나라 때에 둥베이(東北) 지방에서 한반도 북부에 거주한 퉁구스계의 여러 민족을 통틀어 이르는 말. 만주족의 선조로 뒤에 7부로 나뉘었으며, 속말 말갈(粟末靺鞨)을 중심으로 발해를 세웠는데, 흑수 말갈(黑水靺鞨)은 이에 대립하여 나중에 금(金)을 세웠다. 우리말샘

주11

신기하고 이상하다. 우리말샘

주12

나라나 지역 따위의 구간을 가르는 경계. 우리말샘

주13

우리나라 현악기의 하나. 오동나무와 밤나무를 붙여 만든 장방형의 통 위에 명주실을 꼬아 만든 여섯 개의 줄이 걸쳐 있다. 술대로 줄을 뜯어서 연주하는데, 관현악에 반드시 편성되며 독주 악기로도 널리 사용한다. ⇒규범 표기는 ‘거문고’이다. 우리말샘

주14

정당(正堂)과 옥우(屋宇)라는 뜻으로, 규모가 큰 집과 작은 집을 아울러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15

쇠붙이로 된, 원기둥 모양의 장식이 있는 불탑의 꼭대기 부분. 우리말샘

집필자
옥나영(숙명여자대학교 강사, 한국고대사(불교사상사))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