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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기 중의 수증기가 물방울이 되어 지상으로 떨어지는 기상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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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측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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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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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용어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대기 중의 수증기가 물방울이 되어 지상으로 떨어지는 기상현상.
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빗방울의 크기는 지름 0.5∼5㎜로서 보통 1∼2㎜ 정도이고, 소나기의 경우에는 2∼7㎜ 정도가 된다. 빗방울이 매우 큰 경우에는 낙하 도중에 작게 갈라져 버리고, 0.5㎜ 이하인 경우에는 낙하속도가 매우 느려져 마치 안개가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안개비를 형성한다.
구름을 형성하는 물방울의 크기는 지름이 0.004∼0.02㎜ 정도의 대단히 작은 것이며, 부력 때문에 작은 구름물방울이 그대로 떨어져 비가 되는 것이 아니고 구름물방울들이 서로 뭉쳐서 큰 덩어리가 되어야 하므로 10만∼100만개 정도의 구름물방울이 합쳐져 비로소 1개의 빗방울이 형성되는 셈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비의 생성
많은 양의 구름물방울이 모여 빗방울이 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대체로 두 가지 이론이 있다.
첫째, 빙정설(氷晶說)에 의하면, 구름 속의 물방울과 빙정이 섞여 있다가 물방울의 증발에 의하여 빙정이 성장하게 되고 무거워진 빙정이 떨어지는 도중에 녹으면 비, 녹지 않으면 눈이 된다는 것이다.
둘째, 운립포획설(雲粒捕獲說)에 의하면 구름물방울보다 대단히 큰 염분 핵을 중심으로 한 물방울이 존재하는데, 이 물방울이 작은 구름물방울들을 병합하여 빗방울로 성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기상학적 원인을 기준으로 비의 생성을 분류해 보면, 대류성·지형성·전선성·수렴성 비가 있다. 대류성 비는 우리 나라의 여름철 저녁 때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서, 대기의 아래층이 가열되거나 상층에 찬 공기가 흘러 들어오면 성층이 불안해져 상하의 대류현상을 일으키게 되고, 구름 꼭대기에 빙정이 생길 정도로 낮은 온도상태가 유지되면 구름 밑바닥 부분에서 심한 비가 내리게 된다.
지형성 비는 습윤한 공기가 높은 산을 따라 상승할 때 생성되는 것으로서, 단열팽창에 의한 공기의 냉각으로 비구름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전선성 비는 온난전선이 한랭한 공기 위로 상승하거나 한랭전선 밑으로 온난다습한 공기가 파고 들 때 생성된다. 수렴성 비는 태풍의 경우가 대표적인 것으로서 중심 저기압의 주변에서 생성되어 심한 바람과 함께 많은 비를 내리게 된다.
영역닫기영역열기강우량
지상에 내린 비의 깊이를 ‘㎜’ 단위로 나타낸 것을 우량(雨量)이라 하는데, 이는 내린 비가 다른 곳으로 유출되거나 땅 속에 스며들지 않았을 때 물이 차 있는 깊이를 뜻한다.
강우량을 측정할 때는 지름이 일정한 물받이통을 사용하되 통 주변의 물이 튀지 않도록 통의 높이를 25㎝ 이상으로 하고, 통 둘레에는 풀·볏짚 같은 것을 깔아주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통 안에 빗물이 괴면 자를 수직으로 넣어 물의 깊이를 재어 우량을 측정하게 된다.
물받이통의 지름이 일정하지 않을 경우에는 물의 깊이가 정확한 우량을 나타내지 못하므로, 이럴 때에는 물의 무게를 단 후 물받이통의 주둥이 넓이로 나누면 우량이 된다.
우량계의 규격은 각 나라마다 다르나, 우리 나라에서 사용하는 우량계는 수수기의 구경 20㎝의 높이 각 20㎝에 저우기의 길이 40㎝인 원통형으로 규정되어 있다.
단위시간당 우량이나 하루 동안의 우량으로써 비의 강도를 표시하게 되는데, 1일 우량 5㎜ 미만은 극히 약한 비, 5∼20㎜는 약한 비, 20∼50㎜는 보통비, 50∼80㎜는 강한 비, 100㎜ 이상은 특히 강한 비 등으로 분류한다.
우리나라에서의 강수분포를 지역별로 보면, 제주도의 남동해안 지대가 1,800㎜ 정도로 가장 많고, 남해안 지대가 1,500㎜ 정도, 백두산 남동부가 500∼600㎜로서 대체로 강수량이 남에서 북으로 가면서 점차 감소하는 경향을 보인다.
강우량은 지세의 영향에 따라 분포상태가 크게 좌우되는데, 소백산맥과 노령산맥의 남부·서부는 우리 나라 최다우지역을 이루고, 태백산맥·차령산맥의 북부인 임진강·한강 상류지역은 제2다우지역을 이루며, 낭림산맥·묘향산맥의 남부지대인 청천강 중류지역은 제3다우지역을 이룬다.
비의 종류는 다양하지만 우리나라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것으로는 장맛비·호우·소나기·집중호우·뇌우 등을 들 수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비의 역사상 기록
비는 우리의 생활에 있어서 귀중한 물의 공급원이 될 뿐만 아니라 강우량의 많고 적음은 농작물의 수확량과 직결되므로 비에 대한 옛 기록은 다른 어떤 기상요소보다도 많다. 삼국시대·고려시대·조선시대의 순으로 그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1. 삼국시대의 비에 관한 기록
    『삼국사기』에 나타난 비에 관한 기록을 조사해 보면, 단순히 비[雨]라고 표시한 것 외에 폭우, 비가 안 왔을 때의 불우(不雨) 또는 무우(無雨) 등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많은 비로 홍수가 났을 때는 대수(大水)·대우(大雨) 등으로 표현한 것이 많으며, 수일(水溢)·수창(水漲)·수폭(水瀑) 등이 각각 한 번씩 기록되어 있다. 가옥이 무너지거나 인명피해를 초래했던 홍수는 대수·대우로 기록되어 있고, 그 상황에 대해서도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신라본기 제2에 의하면, “이사금 41년(350) 여름에 큰 비가 10일간이나 내려 평지에 물이 3, 4척이나 괴고 관사와 개인집이 물에 잠겼으며 산이 열세 곳이나 무너졌다.”라는 기록이 있고, 신라본기 제4에는, “진평왕 11년(589) 가을 7월에 가옥 3만 360호가 물에 잠겼고 사망자는 200여 명에 달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비에 관한 기술 중 특수한 것은 우토(雨土)라고 하여 흙비가 내렸다는 기록이 174년·389년·606년·627년·780년·850년에 나온다. 이 흙비는 바람에 의한 흙먼지가 봄철 비에 섞여 내린 것으로 생각된다.
    또 비와 관련된 다른 특이현상으로는, 백제 구수왕 9년(222)과 신라 나물이사금 18년(373)에 우어(雨魚)가 내렸다는 기록과 고구려 보장왕 15년(656)의 우철(雨鐵)의 대한 기록이 있다.
  1. 2. 고려시대의 비에 관한 기록
    고려시대의 비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와 『증보문헌비고』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려사』에는 비의 종류가 우·소우·대우·음우(淫雨)·임우(霖雨)·뇌우·대뇌우·대우진뢰(大雨震雷)·대우진전(大雨震電)·대우뢰전(大雨雷電)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되어 있고, 『증보문헌비고』에는 대수·대우·폭우·대뇌우·항우로 분류되어 있다.
    월별로는 비교적 고르게 분포되어 있고, 오히려 여름철의 기록이 적다. 이것은 양적으로 많은 비보다 특이한 비에 관하여 기록했기 때문인데 비에 청색 지렁이가 있었다는 기록 혹은 우토(雨土) 등이 그러한 경우이다.
    우토에 대한 기록 중 1200년(신종 3) 윤2월에 “사방이 혼탁하고 우토가 2일 동안 내렸다.”는 기록과 1260년(원종 1) 1월에 “우토가 내리고 해가 어둡다.”라는 기록에서 나타나듯 우토는 단순히 흙·모래가 섞인 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와 수반되는 현상도 포함한 표현인 것 같다.
    안개에 인용한 음무(陰霧)·혼무(昏霧)·침무(浸霧)도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미세한 흙모래가 공중에 떠 있는 동안에 안개가 겹친 것으로 볼 수 있다.
    대우나 대수는 강수량이 많았던 비를 나타내고 있으며 그 월별 분포를 보면 음력 5·6·7월에 집중되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의 우기와 잘 일치된다. 때때로 계속되는 비인 항우(恒雨)는 『고려사』에 4회, 『증보문헌비고』에 2회 기록되어 있고, 장맛비를 뜻하는 임우는 2회, 음산한 비인 음우는 3회 기록되어 있다.
    그 밖에 소나기인 취우(驟雨)는 1회, 폭우는 『고려사』 3회, 『증보문헌비고』 1회로 기록되어 있다. 강수의 지속과 피해상황을 수량적으로 표시하고 있는 경우도 많은데, 그 한 예로 『고려사』와 『증보문헌비고』의 기록을 보면, 1026년(현종 17) 7월에 “경도에 대우가 4일 동안 내려 백성의 집이 떠내려 가 훼손되었고, 9월에는 서경에 대수로 인해 민가 80여 호가 떠내려 가거나 침수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인명피해가 가장 컸던 기록은 명종 16년(1186)에 민가 100여 호가 물에 떠내려 가고 사망자가 1,000여 명에 달했다는 대수피해에 관한 기록이다.
  1. 3. 조선시대의 비에 관한 기록
    벼농사는 다른 농작물보다 우기와 우량에 더 많은 영향을 받고 있으므로 조선의 역대왕조는 강수에 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특히 정량적 수단에 대하여 세계의 다른 나라에서는 관심조차 없었던 시대에 세종이 측우를 시작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세종 때에는 강수 중에서도 농사에 직접 영향을 주는 분량을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을 이미 깨닫고 있었다. 어떤 지역에 강수현상이 있었다고 하면 그 강수량 중에 상당량은 하천으로 유출되고 또 그 일부는 증발해 버린다. 따라서 그 지역의 농사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수량은 유출과 증발을 제외한 나머지 침투수가 된다.
    세종은 강우에 의한 흙의 침투수량을 알아보기 위해서 비온 후 흙을 파서 빗물이 흙 속에 얼마나 깊이 스며들었는가를 측정하도록 하였다. 이 방법이 처음 실시된 것은 1423년(세종 5) 궁중에서였는데 그에 대해서는 “세종 5년 임오일 비가 온 바로 그날 밤 흙 속에 스며든 빗물은 1촌보다 약간 많았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로부터 2년 후 “세종 7년 4월초부터 지금까지 가뭄이 있다. 명하기를 각도 군현에서는 비가 오면 흙을 파서 빗물이 스며든 깊이를 재어 빨리 알릴 것.”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로 보아 침습도를 이용한 측우를 각 지방으로 확대 실시하도록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방법을 연중 실행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으므로 고심한 끝에 발명된 것이 측우기였다. 측우기에 대한 기록을 『세종실록』에서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세종 23년 8월 임오일에 호조에서 아뢰었다. “각도 감사가 우량을 전보(傳報)하도록 이미 법이 이루어졌으나 토성(土性)의 조습(燥濕)이 같지 아니하고 흙 속으로 스며든 얕고 깊음도 역시 알기 어렵사오니 청하옵건대 서운관(書雲觀)에 대(臺)를 짓고 철주로 그릇을 부어 만들되 길이는 2척이 되게 하고 직경은 8촌이 되게 하여 대 위에 올려놓고 비를 받아 본관 관원으로 하여금 얕고 깊음을 척량(尺量)하여 보고하게 하고……그대로 따르다.”
    ② 세종 24년 5월 8일 호조에서 아뢰었다. “우량을 측정하는 일에 대하여는 일찍이 명령을 받았사오나, 아직 다하지 못한 곳이 있으므로 다시 갖추어 조목별로 열거합니다. 서울에서는 쇠를 주조하여 기구를 만들어 명칭을 측우기라 하니 길이가 1척 5촌이고 직경이 7촌입니다. 주척(周尺)을 사용하여 서운관에 대를 만들어 측우기를 대 위에 두고 매양 비가 온 후에는 본관의 관원이 친히 비가 내린 상황을 보고는 주척으로써 물의 깊이를 측정하여 비가 내린 것과 비오고 갠 일시와 물깊이의 척·촌·분의 수를 상세히 써서 뒤따라 즉시 계문(啓聞)하고 기록해 둘 것이며, 외방에서는 쇠로써 주조한 측우기와 주척 매 1건을 각 도에 보내어 각 고을로 하여금 한결같이 위 내용의 측우기 체제에 의거하여 자기 혹은 와기의 적당한 데에 따라 구워 만들고 객사의 뜰 가운데 대를 만들어 측우기를 대 위에 두도록 하며, 주척도 또한 위 내용의 체제에 의거하여 대나무 혹은 나무로 미리 만들어 두었다가 매양 비가 온 후 수령이 친히 비가 내린 상황을 살펴보고 주척으로써 물의 깊이를 측량하여 비가 내린 것과 비오고 갠 일시와 물깊이의 척·촌·분의 수를 상세히 써서 뒤따라 계문하고 기록해 두어서 후일의 참고에 전호(典號)로 삼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르다.”
    위의 두 기록으로부터 측우기 제작일을 추정할 수 있는데, 이에 따르면 세종 23년 8월에 이미 측우기가 제작되어 사용되었거나 24년 5월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많고, 그렇지 않다면 24년 5월에 측우기 제작계획이 최종 결정되어 곧 제작에 착수되었을 것이므로 세종 24년 중에 완성되었을 가능성이 큼을 알 수 있다.
    『증보문헌비고』 권2 상위고(象緯考) 의상(儀象)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어 적어도 세종 24년에는 틀림없이 측우기가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세종 24년에 측우기를 만들다. 주동으로 된 그릇으로 측우기라 명한다. 길이는 1척 5촌이고 원경(圓徑)은 7촌이며 서운관에 축대를 설치하고 측우기를 그 위에 놓는다. 비가 온 후면 서운관의 관원이 주척을 가지고 수심을 분·촌으로 재고 즉시 보고한다. 또한 이 측우기와 주척의 제식(制式)을 각 도읍에 널리 알려서 각 지방마다 1개씩 만들어서 객사 마당에 놓게 하고 비온 후 수령이 친히 깊이를 재서 보고한다.”
    세종의 계통적인 측우사업은 1586년(선조 19) 5월 정유에 ‘우수심포백척일촌일분(雨水深布帛尺一寸一分)’이라는 기록을 마지막으로 일단 끝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이후 전란으로 말미암아 세종 때 제작된 원기(元器)마저도 파괴되어 현재에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1769년(영조 46)에 다시 측우기를 만들어 궁중뿐 아니라 팔도에도 배치하여 측우에 힘쓰도록 하였다. 그 결과 측우사업이 다시 체계 있게 시작되었다.
    이 당시의 측우에 관한 첫 기록은 『승정원일기』에서 나타난다. 세종 이후 영조 이전까지에 기록된 강우량 자료는 모두 유실되고 없지만, 1770년부터 1907년까지 서울에서 관측한 조선시대의 월별 강우량과 연도별 강우량은 현재까지 기록이 보존되어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1800년(정종 24) 10월 이후부터는 우량의 월합계도 계산하도록 규정하였으나 이미 이에 앞서 정종 15년 이후 우택(雨澤)의 많고 적음은 반드시 기록해서 비치해 두고 1년을 통한 셈을 했다. 그 통계 결과를 살펴보면 정종 15년에 8자 5치 9푼의 기록으로부터 정종 22년에 5자 5치 6푼의 기록까지 8년간의 연강우량이 명확하게 비교되고 있다.
    1798년 5월의 우량과 1799년 5월의 우량을 비교하여 “전년도에 호서(湖西)는 심히 적은 양이었으나 금년은 이미 2치를 넘었다.”고 지적하는 등 우리들이 현대기상대에서 발표하고 있는 기상통보를 듣는 것과 같은 느낌을 갖게 하고 있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의 강우 관측은 세계적으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정밀하고 정비된 관측사업이라고 하겠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나 있는 지방에서의 측기 관측의 실례는 두세 가지에 지나지 않으나 1799년(중종 23) 5월 기묘의 교시 중에서 호서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그 밖에도 상당수의 측기 관측의 보고가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한편 중앙에서는 벼농사기간 특히 6월(태음력)의 강우량이 가장 중요시되어 실록 등에도 빈번히 기록되어 있으며 강우의 많고 적음에 대한 언급도 나타나 있는데, 1842년(헌종 8) 6월 임오에 “전야5경(4시)부터 신시(16시)까지 비가 내렸으며 그 양은 1치 3푼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수표관측이 실시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록을 찾아보기가 매우 힘들다는 사실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강우 관측의 실시상황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으나 실은 수량적으로 표현하지 않은 강우기록이 대단히 많고, 『세종실록』 권42에서 “큰 비로 한강의 물이 불어 평지의 수심이 30자나 되었다.”라든가, 『순조실록』 권18에서 1815년(순조 15) 8월 신미에 경상감사가 “지난 달 24일과 25일에 비가 내려 평지의 수심이 3자나 되었고, 함안 등 여러 읍의 민가 2,019호가 물에 떠서 무너지고 570명이 익사하였다.”라고 치계(馳啓)하고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옛 관례에 따라 목측에 의한 개략적인 수량을 말한 경우도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비의 종류와 비와 관련된 재해의 종류에 대하여 월별분포상태를 살펴보면 [표 1]·[표 2]와 같다.
    [표 1] 비의 종류별 월별분포
    종류\월123456789101112
    淫雨11
    大雨124310
    111119225
    大霖雨11
    連雨11
    淫霖22
    霖雨11
    雨澤11
    暴雨1225
    風雨11
    驟雨11
    大雨風雷11
    -2-111410166---50
    주 : 월은 양력으로 환산한 것임.자료 : 조선왕조실록.
    [표 2] 재해의 종류 및 월별분포
    종류\월123456789101112
    水災4217
    陰雨災(山崩水溢)11
    雨水過多11
    水溢11
    大水33
    被水11
    幾水11
    合計-----1-1121--15
    주 : 월은 양력으로 환산한 것임.자료 : 조선왕조실록.
    [표 1]에서는 6·7·8·9월에 비가 집중되어 있으며, [표 2]에서는 재해가 8월에 집중되어 있다. [표 1]은 우기와 태풍내습기에 일치되고 [표 2]는 주로 태풍내습기와 일치된다고 볼 수 있다.
    [표 1]에서 2월의 연우(連雨)와 대우는 건조기에 있었던 이상강우로서 당시의 상황을 『단종실록』 권5에서 살펴보면 1453년(단종 1) 정월에 “연우 때문에 도로가 밀물로 수렁이 되고 깊이가 정강이까지 잠길 정도여서 사람과 말이 고통을 겪었다.”로 되어 있고, 『연산군일기』 권29에서는 1498년(연산군 4) 정월 계해에 있었던 경상도 관찰사의 치계에 의하면 “정월 13일(2월 14일)부터 14일까지 큰 비가 내려 물가에 있던 밀·보리 밭이 전부 물에 잠겨 손해를 보았다.”고 되어 있다.
    6월의 대우풍뢰는 이상저온을 몰고 온 이상현상으로서, 1600년(현종 1) 5월 신사일의 장계에 “강원도 강릉 등지에서 5월 초7일(6월 15일)부터 13일(20일)까지 큰 비가 풍뢰와 겹쳐 일어났고 비가 그친 다음에는 심한 서리가 내려 초목이 다 죽고 목화와 기장이 전부 동상을 입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피해상황을 중시하여 다루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인명과 농작물 등에 대한 재해예방을 위하여 적극적인 방재대책을 마련하는 등 역사적 경험과학을 통한 새로운 기술개발에 부단히 노력하였다고 생각된다.
영역닫기영역열기비와 생활
비가 끼치는 큰 영향 중 하나는 농업에 있다. 관개사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던 옛날에는 물의 원천이 되는 비가 내리지 않을 경우 가뭄으로 인해 심한 피해를 입기도 하여 나라와 민간에서는 기우제가 성행하였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이래 나라와 백성 사이에 기우제가 성행하였는데, 가뭄이 들면 왕이 정사를 잘못한 천벌로 여겨 왕 스스로 몸을 정결히 하고 하늘에 제사하였으며 식음을 폐하고 죄인을 석방하는 등의 일을 행하였다. 민간에서도 신역(神域)을 정하여 제단을 쌓고 마을 전체가 기우제를 지냈다.
고려시대에는 종묘사직과 구월산, 남·북교(南北郊)·임해원(臨海院) 등에서 무당이 기우제를 올렸다. 한발이 심하면 왕이 직접 남교에 나와 기우제를 올리고 백성들은 시장을 옮기고 부채질이나 양산·관(冠) 쓰기를 삼갔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종묘사직, 사대문(四大門:興仁·崇禮·敦義·肅靖), 동서남북의 4교(四郊)와 중앙 종각 앞, 모화관(慕華館)·경회루(慶會樓)·춘당대(春塘臺)·선농단(先農壇)·한강변 등에서 기우제가 행해졌으며 한발이 심할 경우에는 12차례에 걸쳐 3품 이상의 관원을 파견하여 기우제를 올렸다.
우리 생활에 빗물과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은 물레방아이다. 물레방아는 농업용수의 이용에서부터 양곡을 찧는 일까지 하는 등 우리 나라 농업용구의 대표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웬만한 동리에는 최소한 한 대씩 설치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현대화에 밀려 유물로만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또 관개용 저수지 및 큰 규모의 전력을 얻기 위한 수력발전소용 댐 등이 모두 이 비에서 비롯되고 있다. 이 밖에도 비중이 큰 비의 영향으로는 비로 인한 지표면의 침식과 방사능에 있다. 집중호우와 같이 비가 강하게 내릴 때는 강한 운동력 때문에 표면의 토양이 침식을 받아 표층의 귀중한 비료분을 유실시킬 뿐 아니라 도로를 손상시키게 된다.
특히 지질이 석회암으로 되어 있는 곳에서는 비에 의한 침식작용이 심하여서 카르스트지형을 형성하게 된다. 우리나라에는 석회암지대가 많아 카르스트지형을 이루는 곳이 많다.
과학이 발달되면서 원자폭탄이나 수소폭탄 실험이 행해지게 되어 빗물에는 극히 강한 방사능 물질을 포함하는 경우가 많게 되었다. 이 방사능물질은 인체에 여러 가지 형태로 부작용을 일으키고 있어 오늘날의 비는 옛날처럼 낭만적인 느낌으로만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영역닫기영역열기작품상의 비
농경사회에 있어 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단군신화에서 환웅(桓雄)이 태백산 아래 내려와 인간을 구제하려 할 때 풍백(風伯)·운사(雲師)와 함께 우사(雨師)를 거느리고 왔다고 하여 비를 관장하는 천관이 등장하고 있다.
농사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 있어서 바람이나 구름과 같이 비를 다스리는 일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만일 하지가 지나도 비가 오지 아니하면 나라에서나 혹은 각 지방에서 기우제를 지내어 비가 오기를 하늘에게 빌었다.
기우제는 나라에서 지내는 것이 가장 규모가 크며 장소와 지내는 순서도 달라 종묘·사직단·흥인문·숭례문 등 여러 곳에서 행하였다.
그리고 이 때 국왕은 수라상에 반찬을 줄이고 억울한 죄수를 심리하여 풀어주는 등 여러 가지 조처를 취하며 군왕이 백성을 다스리는 데 무슨 잘못이라도 있었는가 하는 반성을 하며 하늘에 비를 내려주기를 빌었다.
그러나 이러한 비도 너무 많이 오면 가뭄과 마찬가지로 농사에 지장을 준다. 입추 이후 비가 계속 내리면 다시 기청제(祈晴祭)를 지내 비가 개이기를 하늘에 빌었다. 이러한 가뭄과 장마는 다 같이 농업의 수확량을 좌우하는 것이며 그것은 민생과 직결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제사가 이루어진 것이다.
비가 많이 내려 홍수가 지면 모든 것이 떠내려 가기 때문에 천지개벽의 새 세상이 열린다고 생각하여 이에 대한 여러 설화가 만들어졌다. 이러한 설화를 통화여 새로운 천지창조에 대한 설명이 시도되고 있다.
이러한 홍수설화로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홍수가 진 뒤 한 남매만이 살아남고, 하늘의 뜻에 따라 서로 부부가 되어 이 세상의 인류가 다시 번창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그 하나다.
다른 하나는 큰 나무와 교구하여 탄생한 소년이 홍수가 일어나자 그 나무를 타고 떠내려 가면서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는 것이다. 이 때 홍수는 새로운 세상을 열게 하는 매개체의 구실을 하고 있다.
비는 문학작품에도 여러 가지로 투영되어 있다. 정극인(丁克仁)이 지은 「상춘곡」 등에 나타나는 세우에 대한 감각이 그러한 것 중에 하나다. 가늘고 곱게 내리는 봄비는 만물의 생성을 촉구하는 자비로운 손길로 느껴져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가는 비가 방울져 연잎에 구슬로 떨어지는 고운 모습을 박인로(朴仁老)는 「독락당 獨樂堂」이란 가사에서 노래하고 있다. 비는 군왕의 은혜로 비유되기도 하였다. 만물을 자라게 하는 것이 비라면 만백성을 살리는 것이 군주라 생각한 때문이다.
그리하여 「자경별곡 自警別曲」 같은 가사에서는 임금의 은혜를 우로은택(雨露恩澤)이라고 노래하였다. 군주를 도와 백성을 잘 다스리고 싶은 심정을 정철(鄭澈)은 「관동별곡」에서 삼일우(三日雨)를 얻어 그늘에 시들은 풀들을 살려내고 싶다고 읊었다.
비는 또 하늘이 보내주는 어떤 조짐으로도 이해되고 있는데, 박인로의 「태평사」에서 임진왜란 때에 가토(加藤淸正)를 잡을 수 있었으나 하늘이 비를 내려 군졸들을 피곤하게 하여 이를 실행하지 않았다고 읊은 것이 그 보기다.
이 밖에도 장마 때의 비는 정치현실의 어려움으로 비유되기도 하였다. 윤선도(尹善道)의 「하우요 夏雨謠」에서는 비오는데 들에 나갈 수 없으니 소나 먹이고 장기 연장이나 다스리라고 하며 장마가 오래 계속될 수 없다고 읊었는데, 이 때의 장마는 곧 간신배가 이끄는 조정을 비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또한 맑은 햇살이 빛나는 밝은 정치가 이루어지는 때와 대비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궂은 비의 또 다른 감각은 정철의 「속미인곡」에서 달과 대조되어 섬세하게 나타나 있다.
헤어진 임을 그리워하는 안타까움에서 주인공이 달빛이 되어 임의 창 밖을 비추고 싶다고 하소연하였을 때, 시에 나오는 다른 화자는 달빛보다는 차라리 궂은 비가 되라고 권하고 있다.
깊은 밤에 달빛이 주는 시각적인 자극보다는 임을 깨울 수 있고 자극할 수 있는 궂은 비의 낙수소리의 청각적 이미지가 더 임에게 호소력이 있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비는 생활을 촉구하는 풍요의 원천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인 여러 측면이 우리의 문학에 등장되었는가 하면, 그것이 너무 지나쳐 장마를 이룰 때의 부정적인 측면도 부각되어 있다.
전자에서 생활의 풍요함, 세우가 주는 섬세한 아름다움의 발견이 주라면, 후자에서는 홍수에 의한 천지의 변혁과 폭정에 대한 비유 등으로도 나타나 있다. 또한, 비는 하늘의 의지를 나타내는 징조의 하나로도 노래되어 경천사상의 일부로도 부각되고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6년)
김광식|정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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