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성집(聖集)·군집(君集), 호는 송석(松石). 참의 송시철(宋時喆)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송광순(宋光洵)이고, 아버지는 호조참판 송징은(宋徵殷)이다. 어머니는 민도(閔燾)의 딸이다.
1699년(숙종 25)에 생원시에 합격, 1705년에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11년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에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이 되었으며 강도(江都)에서 무재(武才)를 시험하기 위해 어사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1713년에 홍문관수찬에 임명되었고 세자시강원의 겸문학(兼文學)을 겸임하였다.
1715년(숙종 41) 부교리로 있으면서 소장(疏章)의 출납에 대한 내의원(內醫院)의 방금(防禁)이 심하다고 했다가 파직되었다. 이듬해 복직되어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을 거쳐 이조좌랑이 되었으나 계언(啓言)이 왕의 비위를 거슬려 파직되었다. 그 뒤 1717년에 보덕(輔德), 1719년에 사인(舍人)으로 임명되었다.
경종 즉위년인 1720년에 부응교·동부승지가 되었는데 정치의 득실을 상소하다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1723년(경종 3)에 승지·대사성, 그리고 황해감사를 역임했고, 영조 즉위 후 다시 대사성에 임명되었다. 또한 실록청당상(實錄廳堂上)으로 제수되어 『숙종실록(肅宗實錄)』 개수에 참여하였다.
이 해에 진주부사(陳奏副使)로 청나라에 가서 명(明)의 『태조실록(太祖實錄)』과 『대명회전(大明會典)』에 태조가 고려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아들로 잘못 기재된 것의 정정을 요구하였다. 이듬해에는 우윤·이조참판·부제학에 임명되었고, 1729년(영조 5)에는 형조참판·대사성에 임명되었다. 사은부사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가 곧 호조참판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에는 공조참판·동경연(同經筵)·예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731년에는 되었고, 도목정사(都目政事: 관리들의 근무 성적을 평가하던 제도)을 실시하여 공조판서로 임명되었고 반송사(伴送使)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이듬해에는 대사헌·판윤·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예문관제학 겸 예조판서를 거쳐 대사헌을 지냈다.
1735년에는 좌참판을 거쳐 함경도관찰사에 임명되었고 임기 동안 도내에 문학을 권장하여 교육을 진흥할 것을 상소하였다. 1736년에는 공조판서로 임명되고 그 뒤 좌참찬·대사성·좌참찬에 거듭 임명되었다. 1739년에 다시 공조판서에 이어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문명이 있었으며, 저서로 『송석헌집(松石軒集)』과 편서인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