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묘는 668년(보장왕 27) 9월 고구려 수도인 평양성이 당나라 군대에 포위되었을 때, 군사를 맡은 승려 신성(信誠) 및 소장 오사(烏沙)와 함께 당나라 장군인 이세적(李世勣)과 내통해 성문을 열어 당나라 군대가 진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결국 고구려군의 분전에도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고구려는 멸망하게 되었다.
2017년 12월 중국 산시성 시안[西安]에 있는 서안비림박물관에서 ‘대당고좌령군원외장군고요묘묘지(大唐故左領軍員外將軍高鐃苗墓誌)’가 발견되었다. 지석에는 고요묘가 요동(遼東) 사람으로 “창해(滄海)를 등지고 귀순해 와서 천자의 청정무위(淸淨無爲)한 교화를 우러러 벼슬길에 올랐다”고 하며 “황제의 큰 은혜를 입어 황제를 가까이서 모시게 되었다”가 “함형(咸亨) 4년(673) 11월 11일 사저에서 죽었다”고 한다. 묘지문의 내용을 검토한 결과 묘주는 고구려 출신 고요묘(高鐃苗)이며 고구려 평양성을 수비하던 요묘(饒苗)와 동일한 인물로 추정되고 있다.
묘지명에 의하면 요묘는 668년 12월 당에 들어가 종3품 좌령군원외장군(左領軍員外將軍)이라는 고위 무관직을 제수받고 황제를 호위하고 궁정을 수비하는 일을 맡았다고 한다. 보장왕과 남생이 당에서 받았던 관직이 정(正)3품관이었다는 사실과 비교해 고요묘가 종(從)3품관을 받았다는 것은 고구려 멸망에 그의 공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지석에는 고요묘의 죽음에 대해, ‘집안의 대문에 붙어사는 여러 귀신들이 재앙을 내려 갑자기 사제에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대해 당시 중국에 끌려왔던 고구려 유민이나 부흥운동세력에 의해 살해되었을 가능성을 추정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