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가관 ()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후기 경상도부원수, 경상도도순문사, 판밀직사사 등을 역임한 관리. 무신.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1387년(우왕 13)
본관
해평(海平)
출생지
미상
주요 관직
밀직부사|경상도부원수|경상도도순문사|판밀직사사
정의
고려후기 경상도부원수, 경상도도순문사, 판밀직사사 등을 역임한 관리. 무신.
개설

본관은 해평(海平)이다. 충혜왕 때 좌정승에까지 오른 윤석(尹碩)의 증손으로,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윤지표(尹之彪)의 손자이고, 대호군 윤보(尹寶)의 아들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공민왕 말년에 왕의 총애를 받아 근시(近侍)하였는데, 1373년(공민왕 22) 공민왕이 한안(韓安)·홍륜(洪倫) 등으로 하여금 모든 비빈(妃嬪)들을 욕보이게 하면서 윤가관에게는 익비(益妃)를 범하도록 하였으나 끝내 거절하였다.

이 때문에 왕의 미움을 받아 서인(庶人)으로 폐하여졌으나 곧 풀려났다. 우왕 때 밀직부사에 올랐으며, 1383년(우왕 9)에는 경상도부원수가 되어 왜구를 방어하다가 안동·예안 등지에서 패하고 부상을 입었다.

이해 12월에는 경상도도순문사로서 합포(合浦: 지금의 경상남도 마산)에 진수(鎭守)하였고, 다음 해에 함양에서 진주목사 박자안(朴子安)과 함께 왜구와 싸워 크게 이겼다.

이때 왜구가 축산도(丑山島)를 거점으로 자주 침구하므로 수군[船卒]을 두어 이를 방비하도록 하여 이후 왜구의 침략이 약하여지게 되었다.

또한, 못쓰게 된 무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게 하고, 둔전(屯田)을 개척하여 군량을 넉넉히 하였다. 무략(武略)이 있고 성품이 청렴하고 검소하여 염리(廉吏)의 표본이 되기도 하였다. 관직은 판밀직사사에까지 이르렀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집필자
이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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