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7년(고종 4) 거란군이 침입하여 금교역(金郊驛: 瑞興)까지 이르자, 이를 막기 위한 5군 편제에서 대장군으로서 중군(中軍)의 지병마사(知兵馬事)가 되어 군사를 이끌고 숭인문으로 나가 방어하였다.
그러나 거란군이 계속해서 고주(高州: 함경남도 고원)·화주(和州: 함경남도 영흥)를 공격하고 화주의 영인진(寧仁鎭)과 장평진(長平鎭)을 함락시키자 5군과 가발병(加發兵)을 폐지하고 새로이 중군·좌군·우군의 3군을 구성하였는데, 이때 우군병마사에 임명되었다.
그 뒤 상장군으로 승진하였으며, 1224년에 대장군 이극인(李克仁) 등이 최우(崔瑀)를 죽이려다 사전에 발각되어 죽임을 당한 옥사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