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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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의 제17대(재위: 1122년~1146년) 왕.
이칭
인표(仁表)
시호
공효(恭孝)
이칭
왕해(王楷), 왕구(王構)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109년(예종 4)
사망 연도
1146년(인종 24)
관련 사건
이자겸의 난|묘청의 난
내용 요약

인종은 고려전기 제17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1122~1146년이며, 예종의 장자로 이자겸 등에 의해 15세에 왕위에 올랐다. 국자감의 학제를 정비하고, 각 주현에 향학을 설립해 지방교육을 진작시켰으며, 서적소 설치를 통해 유학의 부흥에 힘썼다. 이자겸, 척준경 등의 모반을 진압했다. 묘청·정지상·백수한 등이 주장한 서경길지설에 공감하여 한때 서경천도의 뜻을 품었다. 서경천도가 무산되면서 묘청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김부식을 서경정토원수로 삼아 평정했다. 난 진압 후 김부식 등에게 관찬 사서인 『삼국사기』를 편찬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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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고려의 제17대(재위: 1122년~1146년) 왕.
개설

재위 1122∼1146. 이름은 왕해(王楷), 초명은 왕구(王構). 자는 인표(仁表). 예종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순덕왕후(順德王后) 이씨(李氏)이다. 비(妃)는 이자겸(李資謙)의 3녀 · 4녀인 폐비 이씨, 중서령(中書令) 임원후(任元厚)의 딸 공예왕후(恭睿王后), 병부상서 김선(金璿)의 딸 선평왕후(宣平王后)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성품이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너그럽고 자비로웠다. 또, 학문을 좋아하고 스승과 벗에 대한 예가 밝았다. 1115년(예종 10) 태자로 책봉, 이자겸 등에 의해 1122년 4월에 15세로 왕위에 올랐다.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인종 재위 때 식목도감(式目都監)에서 학식(學式)을 만들게 했는데, 국자학(國子學)은 3품 이상, 태학(太學)은 5품 이상, 사문학(四門學)은 7품 이상의 자손을 입학하게 하였다. 1126년 이자겸의 난이 일어나자, 최사전(崔思全)척준경(拓俊京)을 시켜 난을 진압하고, 이자겸을 잡아 영광으로 유배시켰다.

1127년 척준경을 유배하고, 중외(中外)에 조서(詔書)를 발표해 각 지방의 주현에 향학을 세워 지방자제들의 교육을 진작시켰다. 1128년 묘청(妙淸) · 백수한(白壽翰) · 정지상(鄭知常) 등이 주장한 서경길지설(西京吉地說)에 공감해 서경의 임원역(林原驛)에 대화궐(大華闕)을 짓고 수시로 서경을 순행하였다.

1129년 서적소(書籍所)를 설치해 정치하는 여가에 여러 학사들과 학문을 탐구하고 서적을 강독하게 하였다. 1131년 서경의 대화궁에 팔성당(八聖堂)을 설치해 여러 부처와 명산의 신(神)을 제사하게 하였는데, 이에 서경천도론이 크게 일어났다. 1133년 무학재(武學齋)를 폐지함으로써 무예로 선비를 뽑는 일은 없어졌다.

1135년 묘청 · 정지상 · 백수한 등이 주1 · 주2 · 칭제건원론 등을 내세웠으나, 김부식(金富軾) 등에 의해 좌절되면서 묘청의 난이 일어났다. 이에 김부식을 서경정토원수(西京征討元帥)로 삼아 난을 평정하게 하였다.

묘청의 난을 진압한 후, 1135∼1145년간에 김부식 등에게 명해 관찬사서인 『삼국사기』를 편찬하게 하였다. 이는 주3의 『사기(史記)』를 모방한 기전체(紀傳體)로 50권이나 되는 방대한 것이었다. 능은 개성에 있는 장릉(長陵)이며, 시호는 공효(恭孝)이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동사강목(東史綱目)』
주석
주1

고려 인종 때, 묘청을 중심으로 하여 도읍을 개경에서 서경으로 옮기려고 한 운동. 이 운동이 개경파인 문벌 귀족들의 반대로 실패하자, 묘청 등 서경파는 1135년에 서경을 거점으로 하여 묘청의 난을 일으켰다.    우리말샘

주2

고려 시대에, 묘청 등이 제기한 금나라 정벌에 관한 논의. 인종 4년(1126)에 이자겸이 금나라와 사대(事大)의 예(禮)로 국교를 맺자 북벌론이 대두되었으나, 김부식 등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우리말샘

주3

중국 전한(前漢)의 역사가(B.C.145?~B.C.86?). 자는 자장(子長). 기원전 104년에 공손경(公孫卿)과 함께 태초력(太初曆)을 제정하여 후세 역법의 기초를 세웠으며, 역사책 ≪사기≫를 완성하였다.    우리말샘

집필자
신호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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