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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화(楮貨)

고려시대사제도

 고려 말 조선 초에 사용된 지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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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조선 초에 사용된 지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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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닫기영역열기역사적 배경
고려 말기에는 화폐제도가 문란해 물가 앙등과 상인들의 모리행위로 유통계의 혼란이 극심하였다.
종래 유통되었던 동전은 일찍부터 기능을 상실하고, 은병(銀甁)은 재료인 은의 부족과 악주(惡鑄)의 주조, 도주행위(盜鑄行爲)로 말미암아 가치가 하락하고, 또 현물과의 등가도 높이 형성됨에 따라 일반민에게는 도움도 주지 못하였다.
한편, 교환수단의 주종이었던 5승포(五升布)는 2승포·3승포로 품질이 떨어져 유통수단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이에 유통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으로 1391년(공양왕 3) 3월에 전화(錢貨)·저화 겸용론이 나오고, 그 해 7월에 보다 구체화되었다.
즉, 홍복도감(弘福都監)을 혁파해 자섬저화고(資贍楮貨庫)를 설치하고, 고금의 전법(錢法)과 회자(會子)·보초(寶鈔)의 제도를 참작해 고려통행저화(高麗通行楮貨)를 발행, 5승포와 겸용하면 국가재정의 보충과 유통질서의 회복이 가능하리라는 것이었다.
고려는 이미 원나라과의 관계를 통해 그들의 화폐인 지원보초(至元寶鈔)·중통보초(中統寶鈔)를 사용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저화의 발행문제는 생소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1392년 4월 문하시중(門下侍中) 심덕부(沈德符), 수시중(守侍中) 배극렴(裵克廉)이 자섬저화고의 혁파, 발행된 저화의 환수, 작지(作紙)·인판(印板)의 소각을 거론해 저화유통문제는 보류되었다.
그 뒤 1401년(태종 1) 4월에 하륜(河崙)의 건의로 사섬서(司贍署)를 설치, 이듬해 1월에 저화 2천장을 발행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내용 및 변천
저화 발행 당시 저화 한장의 가치를 상5승포(常五升布) 한 필, 쌀 두말〔斗〕로 책정하였다.
그리고 조신(朝臣)들의 녹봉 일부를 저화로 지급해 국가보유 현물과 민간의 잡물(雜物)을 상호교역하도록 하며, 상거래에서의 저화이용을 강제하였다. 또한, 저화지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 그 해 5월 공사(公私)의 5승포 사용을 일체 엄금하였다.
저화는 저주지(楮注紙)·저상지(楮常紙)의 두 종류가 있다. 저주지는 길이 1자 6치, 너비 4치이고, 저상지는 길이 1자 1치, 너비 1자 이상으로, 처음에는 삼사신판저화(三司申判楮貨)·건문연간소조저화(建文年間所造楮貨)라는 인문(印文)이, 뒤에는 호조신판저화(戶曹申判楮貨)·영락연간소조저화(永樂年間所造楮貨)로 개인(改印)되었다.
그러나 저화가 교환수단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해 민심의 동요와 민생을 불안하게 하자, 1402년 9월 5승포와의 겸용을 명하고 이듬해 사섬서마저 혁파하였다. 그 뒤 1410년 저화의 재통용방침이 결정되자, 민간에서의 5승포 직조를 엄금하는 등 일련의 저화유통책을 펼쳤다.
그 중 서울·개경에 화매소(和賣所)를 설치, 국가보유 현물과 저화의 교환을 도모하고, 장(杖) 1백 이하의 유죄자에 대한 저화수속법(楮貨收贖法)의 채택, 공장세(工匠稅)·행상세(行商稅)·노비신공(奴婢身貢) 등과 같은 일부 세목(稅目)의 금납화(金納化)를 꾀하였다.
그러나 실질가치를 중시하는 일반민의 성향과 저화 자체의 크기·지질에 따른 사용상의 불편, 그리고 소액거래에 도움을 줄 수 없는 명목가치의 책정, 아울러 국가보유물과의 교역이 영속성을 띠지 못한 점 등으로 저화가치는 계속 하락하였다.
1419년(세종 1)에 저화 한 장이 쌀 석 되, 1421년에 쌀 두 되, 1422년에는 저화 석 장이 쌀 한 되로 폭락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423년에 동전과의 겸용이 강구되고, 1425년에는 동전만이 전용화폐(專用貨幣)로 인정되게 되었다.
그러나 동전인 조선통보(朝鮮通寶)도 교환수단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하지 못하게 됨에 따라 1445년 10월 저화의 재통용이 제기되고, 그 해 12월에 동전과의 겸용이 이루어졌다.
그 후에도 저화유통을 위한 노력이 계속되어 1450년(문종 즉위년)에 저화량 조절에 의한 저화가치의 안정책이, 세조 때에는 민간거래에서의 저화전용책이 시행되었다.
이러한 국가시책에도 불구하고 저화는 무용지물화되어 비록 『경국대전』에 포(布)와 나란히 국폐(國幣)로 기재되어 저포 한 장이 쌀 한 되, 20장이 상포(常布) 한 필로 규정되었지만 법전의 규정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1492년(성종 23)에는 지방에서 저화가 무엇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되었고, 1512년(중종 7)경에는 유통계에서 거의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한국화폐소사(韓國貨幣小史)』(최호진,서문당,1974)

  • 『조선화폐고(朝鮮貨幣考)』(유자후,학예사,1940)

  • 「조선초기화폐유통연구(朝鮮初期貨幣流通硏究)」(권인혁,『역사교육(歷史敎育)』 32,1982)

  • 「조선태종대(朝鮮太宗代)의 화폐정책(貨幣政策)」(전수병,『한국사연구(韓國史硏究)』 40,1982)

  • 「조선초화폐제(朝鮮初貨幣制)의 변환(變還)」(이종영,『인문과학(人文科學)』 7,1962)

  • 「朝鮮初期の楮貨について」(宮原兎一,『東洋史學論集』 3,1953)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5년)
권인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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