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해주(海州). 초명은 최천우(崔天祐)이다. 고조부는 해동공자(海東孔子)로 불리고 중서령(中書令)에 오른 문헌공(文憲公) 최충(崔沖)이며, 증조부도 중서령에 오른 문화공(文和公) 최유선(崔惟善)이고, 조부는 중서시랑평장사에 오른 양평공(良平公) 최사제(崔思濟)이다. 아버지는 수사공(守司空)·좌복야(左僕射)·참지정사(叅知政事)·주국(柱國)에 오른 최용(崔湧)이고 어머니는 문하시랑평장사에 오른 문정공(文貞公) 김상기(金上琦)의 딸인 강릉군대부인(江陵郡大夫人) 김씨인데, 최윤의는 이들의 자녀 8남 5녀 가운데 셋째 아들이고 셋째 딸은 예종(睿宗)의 숙비(淑妃)인 장신궁주(長信宮主)이다. 부인은 문하시랑평장사 김양감(金良鑑)의 손녀이자 호부상서(戶部尙書)·삼사사(三司使) 김의원(金義元)의 첫째 딸인 광양군부인(光陽郡夫人) 김씨(1110~1151)이다. 자녀는 2남 3녀로 5명이 있었다.
최윤의는 1102년(숙종 7)에 태어나 27세인 1128년(인종 6)에 감문위녹사(監門衛錄事)로 있다가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이듬해 태학박사(大學博士)에 제수되었다가 우정언(右正言)·지제고(知制誥)로 옮겼다. 1130년(인종 8)에는 광양군부인(光陽郡夫人) 김씨와 혼인하였고, 1133년(인종 11)에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를 거쳐 1136년(인종 14) 좌사간(左司諫)에 올라 전중감(殿中監) 윤언식(尹彦植)과 함께 조제사(弔祭使)로 금(金)에 다녀왔다.
1148년(의종 2)에는 중서사인(中書舍人)이 되어 우상시(右常侍) 최함(崔諴)과 함께 주1 김거공(金巨公) 및 환관(宦官) 지숙(之淑) 등 7명을 탄핵하였다. 처음에 의종(毅宗)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대궐 문 앞에 3일 동안 엎드려 간쟁하니 의종이 마침내 허락하였다. 최윤의는 그 뒤에 곧바로 시예부시랑(試禮部侍郞)을 맡아서 시부(詩賦)로 양충찬(梁忠贊) 등 11명을, 십운시(十韻詩)로 박유시(朴有時) 등 80명을 선발하였다. 같은 해 12월에는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로 다시 자리를 옮겼다.
1151년(의종 5)에는 지대사(知臺事)로 있다가 5월에는 어사대부(御史大夫)·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에 올랐는데, 그가 직접 지은 부인의 묘지명에 따르면 부인이 세상을 떠난 이때 지제고(知制誥)도 맡고 있었다. 이듬해에는 수문전학사(修文殿學士)를 지내다가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와 태부(太傅)에 임명되었고, 1153년(의종 7)에는 수충좌리공신(輸忠佐理功臣)·예부상서(禮部尙書)·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와 태자태부(大子大傅)를 겸하다가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와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오르고 다시 참지정사(參知政事)·수국사(修國史)가 되었다.
1154년(의종 8)에는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로서 지공거(知貢擧)를 맡아 동지공거 김존중(金存中)과 함께 황보탁(皇甫倬) 등을 진사(進士)로 선발하였으며, 다음 해에는 중서시랑(中書侍郎)·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판상서이부사(判尙書吏部事)와 서경유수사(西京留守使)를 겸하다가 권판상서병부사(權判尙書兵部事)를 맡았으며 다시 동북면병마판사(東北面兵馬判事)와 판중군병마사(判中軍兵馬事)를 겸하였다.
1156년(의종 10)에는 수태위(守太尉)·집현전대학사(集賢殿大學士)가 되었으며, 1157년(의종 11)에 문하시랑(門下侍郞)·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에 올랐다. 이해에 의종이 환관인 정함(鄭諴)의 주2에 서명하도록 독촉하는 것을 재신(宰臣)과 간관(諫官)들이 모두 불가다고 주장했는데, 이때 평장사로 있던 최윤의는 우간의(右諫議) 최응청(崔應淸) 등과 함께 부득이하게 서명하였다. 이것은 그가 죽은 뒤인 1171년(명종 1)에 간관(諫官)들의 탄핵을 받게 된 요인으로 작용되어 그의 자손들이 벼슬에 오르지 못하는 처벌을 받았다.
1161년(의종 15)에는 판상서이예부사(判尙書吏禮部事)·감수국사(監修國史)가 되었고, 1162년(의종 16)에는 지공거가 되어 동지공거 이덕수(李德壽)와 함께 이계원(李繼元) 등 진사(進士) 29명과 명경업(明經業) 3명을 선발하였다. 그러나 이해 8월에 향년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주3 출신으로서 화려하고 중요한 관직들을 역임했지만 일 처리가 명백하였다. 관리를 선발하는 데 있어서 공평하고 성실하였으니 현명하고 능력 있는 자를 임용하였다는 평가를 들었고, 한 차례의 성균시와 두 차례의 과거를 관장할 때도 매번 적합한 사람[其人]을 얻었다는 평가를 들었다.
의종 때 평장사로 있으면서 『상정고금예문(詳定古今禮文)』 50권을 찬술하였는데, 이규보(李奎報)가 쓴 「신인상정예문발미(新印詳定禮文跋尾)」에 따르면 그것은 세월이 오래되면서 책장이 떨어지고 글자도 이지러졌기 때문에 최충헌(崔忠獻)이 한 차례 보완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강화도로 천도한 뒤에 그것을 다시 주4로 28부를 찍어 여러 관사(官司)에 나누어 간직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때를 대략 1234년(고종 21)에서 1241년(고종 28) 사이라고 하나, 지금은 이 역시 전하지 않는다. 최윤의는 또한 1151년(의종 5)에 4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부인의 묘지명인 「광양군부인김씨묘지(光陽郡夫人金氏墓誌)」를 직접 지었다. 현재 「최윤의처김씨묘지명」으로 알려진 이 묘지명에는 사별한 아내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이 잘 나타나 있다.